머리 기사
비브스튜디오스, AR 기술로 고척 스카이돔을 버추얼 스튜디오로 완벽 구현
비브스튜디오스가 눈부신 초실감 영상 기술과 함께 1만3000석의 고척 스카이돔을 환상의 버추얼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며 멜론뮤직어워드(MMA2022) 행사를 빛냈다. 11월 26일 열린 MMA2022에서 전체 공연에 대한 AR(증강 현실) 그래픽 작업을 담당한 비브스튜디오스는 2주간의 사전 테크 리허설을 포함, 두 달여 간의 짧은 준비 기간을 통해 거대한 고척 스카이돔을 버추얼 스튜디오로 ...
갑작스레 사랑하는 이모를 하늘로 보낸 후 죽음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강하다고만 생각했던 엄마의 작아진 모습과 어린아이처럼 울던 사촌 오빠, 상실에 빠진 가족들을 마주했다. 내가 두려웠던 건 세상에서 사라지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남겨진 가족이 상처를 겪는 것이 두려웠다. 장례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어떨지 상상에 잠겼다.

더 이상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볼 수 없고, 같이 있기만 해도 즐거운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번 생에 못 해본 게 많아 아쉽기도 했다. 제일 걱정되는 건 부모님이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을 등져도 나는 그걸로 끝이지만 부모님과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나눠줄 재산도 세상을 떠날 생각도 없지만, 세상살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가족들에게 남길 위로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글로 쓰기 전 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각했다. 내게 소중한 주변 사람들과 어떤 일이 있었나 돌아봤다. 웃긴 일도 슬픈 일도 모두 추억했다. 부모님과 다퉜을 때 내가 먼저 사과할걸, 더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해볼 걸 하는 후회가 가장 많았다. 이런저런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옮겨적었다.

'이번 생 덕분에 잘 놀다 갑니다.' 유서의 첫 문구는 유쾌하게 시작했다. 좋은 기억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었다. 부모님, 동생들, 가까운 사람들과 있었던 즐거웠던 에피소드와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유서의 끝부분에는 마지막 소원이자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저를 생각하며 후회나 자책하지 마세요. 이번 삶에서 애틋한 가족으로, 좋은 친구로 만나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 여행은 이제 시작이니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스무 살 내 첫 유서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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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겨울이면 연례행사가 있다. 바로 친정의 김장이다. 우리 엄마는 항상 김치를 한가득 담그신다. 그 규모가 거의 100포기에 가깝다. 김장이 다가올수록 엄마는 분주하다. 배추와 고춧가루 상태를 걱정하고, 김장 전까지 아프면 안 된다고 몸을 사린다.

사실 김장은 고되다. 김칫소를 만드는 것부터가 일이다. 무를 채 썰고, 마늘을 다지고, 고춧가루를 넣어 버무린다. 우리 집 김치엔 청각도 들어간다. 척척척 칼질하는 엄마와 달리, 나머지 가족의 칼질은 영 서투르다. 김칫소를 버무릴 때면 집안에 매운 향기가 넘실거린다.

김장하는 동안 김치가 익거나 퍼지면 안 된다고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젖힌다. 온 가족이 추위에 벌벌 떨며 김장을 한다. 절인 배추를 나르고, 만들어 놓은 김칫소를 바르고, 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한참 한 것 같은데도, 여전히 남아있는 배추가 한 가득이다.
 
덕분에 김장 후에는 몸살 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족들은 '힘드니까 올해는 제발 많이 담그지 말자'라고 엄마를 말린다. 하지만 절대 '김장하지 말자'라고 말하진 않는다. 모두가 김장 김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엄마표 김장김치를 사랑한다.
 
그 많은 김치를 나와 외할머니, 친정에서 일 년이면 다 해치운다. 항상 밥상에 김치가 올라온다. 김치는 정말 효자 반찬이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찜 등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가족 중 가장 김치를 사랑하는 아빠는, 그냥 먹는 김치가 최고라고 하신다.
 
어릴 적, 김장 김치가 유독 맛있게 익었던 어느 해 겨울이 생각난다. 나는 방학 동안 동생과 함께 집 근처 작은 미술학원에 다녔다. 늦었다고 신발을 구겨 신으면서도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 오늘 점심도…."
"알았어.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 와."


미술학원에 간 동생과 나는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누구보다 재빠르게 학원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헤치며, 소복이 쌓인 눈을 씩씩하게 밟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집 현관문을 여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와 동생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식탁 위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뚝배기의 열기로 여전히 바글바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는 소리로, 냄새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물론 맛은 더 기가 막혔다. 엄마 말로는 우리 자매가 한 달 내내 그 김치찌개만 점심으로 먹었다고 했다. 그 해 김장 김치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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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 고금리 특판 때 긴 대기 줄에 서 있던 노년 여인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그는 저축을 하러 온 게 아니고 인출하러 온 것이었다. 이 시점에 저축이 아니라 인출을 한다니? 의아해서 물었더니 은행이 망하면 오천만 원까지 보장된다는데 그 이상을 넣어놔서 너무 불안하다고 했다.

갑자기 금리를 올리고 사람들이 몰리는 게 여간 수상하지 않다는 논리다.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했다. 하루 사이에 뭐가 어떻게 될까 봐 너무 불안해서 돈을 찾으러 왔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됐다. 나 역시 십여 년 전 만기 하루를 앞두고 회사채가 부도나는 바람에 허망했던 적이 있다. 설마 했던 하루가, 공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은행이 망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노년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번호표도 없이 대기 줄에 서 있었다. 남직원이 번호표 없는 사람은 돌아가라고 외치자 노년 여인은 "오천만 원까지 보호된다는 데 일억 넘게 있는데 괜찮겠죠?"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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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하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 이 악물고 참는 부모는 있을지 몰라도 자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잔소리는 결국 덕담이고 조언이고 인생을 좀 더 살아온 인생 선배의 경험담이지만, 아이들은 불필요한 소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 많이 혼났다. 예민한 아버지였지만 훈육에 있어서는 이성적이었다. 매를 댈 때도 신문지를 종아리에 대고 회초리로 때렸다. 잘못한 것만 알면 된다는 취지였다. 두꺼운 솜바지 위에 매를 대기도 해 전혀 아프지 않았다. 다행이었지만 역효과도 있었다. 누나와 아픈 척 연기를 펼치다 둘이 눈이 마주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또 혼났다.
 
잔소리 들을 일이 별로 없었던 누나와 달리 나는 아버지께 많은 훈계를 들었다. 돌이켜 보면 참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자라는 동안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섣부른 감정을 배제한 진심 어린 아버지의 조언이자 걱정이었다.

잔소리를 들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제 끝나지?', '친구들 기다리는데 늦겠네...' 등 잡생각은 이어지는 시간과 비례해 늘기만 했다. 가끔은 편지로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 따듯한 의도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근 친구가 6학년 딸에게 심각하게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딸이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엄마가 흥분해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말하는 모습이 웃겼다고. 역시 잔소리든 훈화든 연설이든 길어지면 역효과다.

글로 잔소리를 예습하는 아빠
    
아이들이 커갈수록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친다. 입 안에서 늘 맴돌지만, 섣불리 내뱉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듣기 싫은 마음도 십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다. 아빠의 직무 유기라고 생각한다. 분노가 피어나면 내적으로 심한 갈등이 일어난다. 충분히 내면과 싸움을 마친 후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발사한다.

순간적인 감정에 상처를 주고 아이들과 사이가 멀어질까 봐 잔소리에도 '노하우'를 담으려 노력한다. 일단 삼십 분 후, 한 시간 정도 후에 이야기 하자고 한다.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 잘못은 사라지지 않지만, 절정에 치달았던 화는 충분히 가라앉을 시간이다. 특히 반복되는 잘못일 때는 더욱 화가 난다. 똑같은 얘기를 하는 것도 똑같은 잔소리를 듣는 것도 모두에게 곤욕이다.
 
최근 아이들 귀가 시간이 늦어 좋은 말로 많이 타일렀다. 태권도가 오후 10시에 끝나는데, 11시가 다 되는 시간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늦게 들어와 엄마와 한바탕을 벌인 다음 날, 아이들이 연락도 없이 또 늦었다.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걱정되고 초조했다. 11시 반에 들어와 하는 말이 인근 아파트 야시장에 다녀왔다고 했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어제 한 약속도 지키지 않은 아이들에게 화가 치솟았다. 막말이 쏟아질 거 같아 둘 다 씻고 와서 얘기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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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 생활을 하던 대학 시절. 우연히 TV를 보다 케이블 채널에서 제이미 올리버 요리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여러 지인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자신이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오븐에 넣은 고기를 꺼내 썰거나 파스타 면이 제대로 익었음을 확인 할 때면 늘 "러블리!"라는 감탄사를 외쳤다. 요리를 하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무렵에 깨달았던 것 같다. 당연히 그 요리를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당연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일단 구하기 힘든 식재료가 한둘이 아니었다. 때는 2010년이었고, '페타치즈'나 '생 바질', '베이비 루꼴라' 같은 식재료가 우리 동네 마트에 있을 리 없었다. 설령 구한다 해도 그 비싼 재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한국의 식재료를 대체품 삼아 그의 요리들을 이따금씩 흉내내곤 했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약간의 '현타'가 왔을 뿐. '이 돈으로 피자 한 판 시켜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이런 맛을 내려고 이 고생을 한 건 아니잖아!' 그 이후로 한동안 외국 음식을 만드는 도전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장장 10년. 강산이 한 번 바뀌었다는 말로는 지금의 변화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이제는 지구 저편의 식재료인 펜넬이나 물소 치즈, 양갈비도 앱으로 주문만 하면 다음날 새벽에 집 앞까지 배송해 주는 세상이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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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환자가 디스크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종종 디스크를 완치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옵니다. 치료 기간은 기본적으로 디스크 상태와 환자에 따라 다릅니다. 디스크 상태에 따라 치료방법이 달라지기도 하고, 똑같은 치료를 하더라도 환자마다 반응이 나타나는 시간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디스크를 치료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우선 디스크를 치료할 때 두 부분으로 나눠서 고려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는 통증만을 고려해 치료하는 기간이고, 또 하나는 통증과 무관하게 디스크 발생 원인을 치료하고 더 좋아지게 하는 강화치료 기간입니다.

통증치료 기간은 당연히 환자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예를 들어 디스크가 아주 심해도 신경회복 속도가 빠르면 금방 치료될 수 있고, 디스크가 심하지 않아도 만성인 경우 치료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수도 있습니다.

보통 통증은 환자의 통증 정도에 따라서 개인차가 있지만 빠르면 2주 안에 깨끗하게 없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디스크가 심하게 터졌지만 디스크로 인해 생긴 염증이 빨리 없어지면, 2주라는 짧은 기간에도 통증이 사라집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상당히 오랫동안 디스크가 진행되었고, 이미 퇴행이 시작된 환자들은 대부분 2개월에서 4개월까지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만성 디스크 환자는 급성디스크 환자에 비해 통증이 날카롭지 않고 좀 둔한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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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히어로물을 참 좋아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즈니 영화 <빅히어로 6>도 주인공이 자신의 형이 만든 의료 로봇과 뛰어난 친구들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이고, 마블 영화도 다양한 히어로들이 나와서 좋아했다.

히어로물들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많이 했다. 일반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능력을 마음껏 부리면서, 사람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모습이 멋졌다. 동시에 영웅들은 마냥 뛰어나고 완벽하지만도 않았다.

개인적인 고뇌를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때 '아, 저 사람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구나' 동질감을 느끼며 심장이 더 뛰었다. 영웅들의 화려한 액션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자신에게 놓인 어려움을 해결해 나갈 때 짜릿함을 느꼈다.

의대에 입학했을 때, 나도 화면에 나오는 영웅처럼 되고 싶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춰 부러움도 사고 인정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대체할 수 없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특출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하려면 환자를 보는 의사가 아닌 무언가 큰 시스템이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통계나 정책 쪽에도 관심이 있어 이 방향으로 진로를 정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막상 와서 보니 나는 특출나지 않았다. 어떤 점들에서는 장점이 있었지만, 약점들 또한 있었다. 비교하는 마음도 자꾸 생겼다. 내 친구 누구는 이것을 잘하고, 내 동기 누구는 벌써 저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기대를 걸었던 정책과 시스템에도 내 관심은 점차 멀어졌다. 나는 영웅이 될 수 없었고, 그런 나는 점점 작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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