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인생 2막, 다시 명함이 생겼다
오늘 아침, 휴대전화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택배 기사님의 안내 문자였다. 무심코 확인한 발송인 칸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마이뉴스.'

기다리던 '시민기자' 명함이 오고 있었다. 짧은 문자였지만 마음의 파동은 한 박자 늦게, 그러나 묵직하게 밀려왔다. 퇴직과 함께 소리없이 사라졌던 이름표가 다시 나를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오늘 그 명함은 내 지갑에 한구석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게는 예전과 다르다. 과거의 명함이 직함과 권위를 증명하는 '방패'였다면, 지금의 명함은 내가 여전히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증표'다. 자긍심과 함께 찾아온 기분 좋은 책임을 기꺼이 껴안기로 했다.

사회적 언어를 잃어버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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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손자 로리가 혼자 자겠다고 했다.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냐고 묻자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늘 엄마와 함께 잠들던 아이가 이제 유치원에 갈 만큼 컸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나 막상 불을 끄고 나면 마음이 먼저 어두워 지는 듯했다.

"괴물이 나오면 어떡해…할머니가 지켜줄 거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잠들지 못하고 자꾸 침대에서 내려온다. 로리의 발소리가 복도를 건너 내 방으로 들락거렸다. 불안한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한 권의 그림책이 떠올랐다. 로리와 함께 보았던 책, 양 선 작가의 <달님이랑 꿈이랑>이다.


책의 첫머리에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달님과 아이의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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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일주일간 휴가를 떠난다고 해서, 어제 아들 집에 들러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들이 독립하기 전 강아지를 분양받아 3년 동안 우리 부부와 한집에서 살았다. 첫 손주에게 유독 정이 많이 간다고들 하듯이, 생후 6주 된 강아지를 데려와 애지중지 키웠기에 그 정은 더 특별할 수밖에 없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거실 여기저기를 누비는 강아지의 익숙한 발걸음을 보니, 함께 살았던 시절의 기억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집 안 다용도실 선반에는 강아지가 쓰던 식기와 장난감 일부가 여전히 놓여 있다. 강아지의 귀환이 마치 어제 잠시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반갑기만 하다. 아들이 출가한 뒤 한동안 조용해졌던 집 안에 다시 강아지가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자, 집 안 분위기마저 금세 생기로 가득 찼다.

오늘 아침, 평소 아내와 단둘이 걷던 산책길에 강아지를 동반했다. 이 산책길 역시 3년 동안 우리 부부의 발걸음에 맞춰 걷던 길이라 강아지는 우리의 동선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강아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마치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처럼 익숙한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아지가 중간중간 뒤돌아보며 우리 부부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모습에, 마치 가족 여행길에 나선 듯한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부부가 늘 산책하는 공원은 수영장이나 놀이터 같은 부대시설은 없지만, 호수를 중심으로 울창한 숲과 나무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산책로이다. 인근 공원에 반려견 전용 공원이 따로 있어 잠시 방향을 바꾸어볼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 우리 부부가 늘 걷던 평범한 숲길을 선택했다.

반려견 전용 시설에서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사람의 보폭에 맞춰 숨을 고르며 걷는 '느린 동행'이 주는 위안이 더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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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즌이 한창인 지난 6일, 동북권에 위치한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 안으로 들어서자 국악 연주에 최적화된 예술당솔샘의 공기가 먼저 가슴을 쳤다. 여느 공연장 특유의 차분한 어둠이 내려앉기 전부터 객석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대략 세어보니 백여 명 남짓 남녀노소가 자리를 채웠다. "오늘 누가 올라오냐"고 묻는 옆사람의 속삭임을 들으니, 초대를 받았다기 보다는 호기심으로 찾은 이들이 많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시작 전부터 로비와 객석 사이를 오가는 말들은 작은 축제의 온도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막이 오르자 열기는 노골적으로 터졌다. 이제 대학교를 갓 졸업한 예비 예술가들이 무대를 여는 순간마다 객석은 함성과 격려의 추임새를 아끼지 않았다. 박수는 끝을 모르게 이어졌고, 누군가의 환호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응답을 불러냈다. 그들의 시선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다. '첫 무대' 앞에 선 젊은 예술가의 등을 밀어주는 연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1월 26일~2월 13일 펼쳐지는 '2026 서울 커넥트 스테이지'는 연극과 무용, 전통분야를 전공하는 대학 졸업 예정자들을 위해 서울문화재단이 마련한 자리다. 일종의 창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에게 '학교 밖' 첫 무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세 분야로 나눠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강북,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은평에서 각각 펼쳐진다.

사회의 첫 발을 내딛는 가슴 떨림을 작업으로 선봬

이날 무대에서 유독 마음에 남은 팀을 꼽자면, 단국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한 두 명의 남녀로 구성된 '비나리즘'이다. 그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첫 문장은 뜻밖이다.

"우리를 연주자가 아니라 시인으로 봐달라."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시인'이라는 이름을 먼저 꺼내 드는 일은 흔치 않다. 아마도 그 말 속에는 자신의 작업이 소리뿐만 아니라 '서사'로도 읽히고 싶다는 욕망이 담겨 있었는지 모른다. 음악을 연주한다기보다 속내가 담긴 이야기를 터놓고 싶다는 의도다. 그 한마디가 놓이자 무대는 연주회가 아니라 한 편의 짧은 고백문학처럼 듣는 이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했다.

첫 번째 곡 '빛의 왈츠'가 지나고, 이어 '어둠의 왈츠'로 넘어가기 직전,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른다. 이내 "이 곡은 지금 우리가 처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며 심경을 토로했다. '어둠'이라는 단어는 흔한 장치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달랐다. 졸업이라는 경계, 예비 예술가라는 불안정한 신분, 무대 밖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상태로 떠밀린 두 사람의 얼굴이 그 단어를 현실의 질감으로 바꿔놓았다.

정말로 그들의 가슴 떨림이 연주에 투영되었을까. 두 대의 가야금에서 흘러나온 음색은 이상하리만치 날카로웠다. 어떤 순간에는 현이 끊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소리가 객석의 귓바퀴를 스쳤다. 기교라기보다 상태의 울림이다. 수년간 연마해온 테크닉을 보여주는 소리가 아니다. 지금 여기의 마음을 드러내는 불안한 얇음이 오히려 진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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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H. 발자크.

맑은 혼이 없는 아름다운 얼굴은 반짝이는 유리의 눈과 같은 것으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브라카

40을 지낸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 A. 링컨.

사람의 얼굴은 개인의 신분증이다. 닮은 얼굴, 비슷한 얼굴이 있지만 똑같은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는 개인의 얼굴을 독특하게 만듦으로써 구별하고 있다. 아무리 성형수술이 발전하더라도 얼굴을 똑같이 만들어 내지는 못 할 것이다.

'얼굴'연구가 조용진은 홍익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가톨릭의과대학에서 7년 동안 인체해부학을 연구하고 일본 도쿄예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서울시립교육대학교 미술과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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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막지 못한 대통령의 정치 생명은 그대로 끝나기 쉽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의원내각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그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1897년 생인 윤보선이 스무 살 적은 박정희를 처음 대면한 것은 1961년 5월 16일 아침 9시경이다. 현석호 국방부장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성호 해군참모총장, 김신 공군참모총장(김구 차남), 김성은 해병대사령관 등이 쿠데타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청와대에 들어왔다.

윤보선은 회고록인 <외로운 선택의 나날>에 "소장 계급장의 장군 한 명과 두 사람의 대령이 더 있었다"라고 썼다. 윤보선은 1989년 5월 16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 회고록에서 상관들을 뒤따라 들어온 그 소장이 박정희였다면서 "운명의 첫 대면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날 박정희의 첫마디는 "대통령 각하, 이렇게 근심을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였다. 윤보선의 첫마디는 "그대를 못 믿겠다"였다. 박정희 옆의 유원식 대령은 "저희들은 이 혁명을 인조반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거들었다. 장면 총리를 광해군으로, 윤보선을 인조 임금으로 설정하는 발언이었다.

사흘 뒤 윤보선은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냥 눌러앉았다. 쿠데타를 받아들이는 듯한 행보였다. 그 뒤 그는 군사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정을 승인해주는 역할을 하다가 1962년 3월에 사임했다.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윤보선


윤보선과 박정희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를 이기고 극(克)하는 관계로 출발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전자가 후자를 '극'하는 관계로 반전됐다. 대통령 사임 뒤 민주화 투사로 변모한 윤보선은 1963년 대선 때 박정희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경력을 폭로했다. 이는 반공주의자 박정희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 대선에서 박정희는 46.64%, 윤보선은 45.09%를 득표했다. 196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51.44%, 윤보선이 40.93%였다. 쿠데타를 당한 사람답지 않게 윤보선은 박정희를 꽤나 압박했다.

두 사람의 충돌은 유신체제 선포(1972.10.17.)와 유신헌법 시행(12.27)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 속에서 한층 격화됐다. 박정희가 사실상의 군주가 되자, 윤보선은 유신헌법을 거부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3년 12월 22일 자 <동아일보>는 윤보선과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한 각계 지도자 11인이 시국간담회를 연 일을 보도했다. 이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의 기폭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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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오랜만에 돌잔치 초대장을 받았다. 한창 오십대를 달리고 있는 우리에게 날아올 초대장이라면 먼 친척의 결혼식이거나 친구 부모님의 부고장이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에 '돌잔치' 초대장은 너무나 뜬금없고, 너무나 신선했다. 코로나 이후 요즘 돌잔치는 소리소문도 없이 치른다고 해서 더 그랬다.

이 신선한 초대장의 주인은 서울 자가에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의 친구였다. 그는 남편 친구들 중에서도 빨리 결혼했고, 빨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또 빨리 결혼식을 올렸는데 또 빠르게 다섯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친구들은 오십 줄에 할아버지 명찰을 단 그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의를 표하고 싶어 했지만, 이 철없는 할아버지는 너무도 신이 나 손자 돌잔치에 자기 친구들을 초대했다. 그것도 부부 동반으로.

이런 이벤트는 가장 늦둥이였던 우리 둘째 딸의 돌잔치를 치른 지 꼭 스무 해만이었다. '요즘 돌잔치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다 금반지가 생각났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뉴스에 '금값'이 빠지지 않고 출석 체크를 한다. 금 한 돈에 백 만원을 넘겼다나. 경기 불확실성, 금리, 환율, 달러, 안전 자산 같은 단어들의 유기적인 관계는 잘 모르지만, 지난주보다 이번 주 금값이 올랐고 다음 주에는 더 치솟을 거린다(이랬는데 폭락, 또 반등.. 금값은 계속 오르락 내리락 중이다).

금반지 한 개만 남겨둘 걸

콩나물을 사러 나간 상가 한켠에서 뚝딱뚝딱 공사가 시작되더니 금거래소 간판이 반짝인다. 상가 1층에만 금거래소가 두 곳이다. 상가를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도 금은방이 눈에 들어온다. 길 건너편에도 하나 더 있었네. 온통 세상이 금밭이다.

문득 집에 두고 온 꿀단지가 떠오른 곰돌이처럼 허겁지겁 돌아와 옷장 속 서랍을 연다. 레트로한 자주색 벨벳 옷을 입은 작은 보석함 안에 단촐하지만 옹기종이 모여 있는 금반지 두 개와 금목걸이 하나가 반짝반짝 웃고 있다.

오늘 시세가 일십백천만십만백...백만. 이러다 금 한 돈에 이백만 원이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갑자기 떡락해서 십만 원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아끼면 똥 된다고 했는데, 이 아이는 똥이 될까, 아니면 황금 똥이 될까. 손가락이 근질근질 심장 옆구리를 긁어댄다.

2024년의 나도 지금과 비슷한 '금팔이 병'을 앓고 있었다. 인터넷을 켜면 메인 화면에서 오늘의 금시세가 인사를 했고, 출근길에는 금거래소 간판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증권거래소처럼 생소하지만 왠지 믿음이 가는 이름이 봉황당과 같은 계보의 금방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방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때도 뉴스와 신문은 연일 금값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늦둥이 둘째의 돌잔치에서 받은 '금 무더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낯가림이 심했던 딸은 드레스를 입고 손님들에게 울음으로 비싼 인사를 했고, 부모님과 일가친척, 친구들은 오랜만에 맡는 베이비 향에 취해 축하 선물로 금반지와 금팔지, 금목걸이를 끼워주고 걸어주었다. 당시 기억으로는 현금 선물이 평균 오만 원쯤이었고, 한 단계 위가 금 한 돈이었다. 리본이 달린 작은 상자에 담긴 금 한돈은 관계를 한 번 더 단단하게 묶어주는 느낌이었다.

돌잔치가 끝나고 나는 금반지를 건넨 손님들에게는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시집갈 때 전해주겠다"고 인사를 했다. 금반지를 담았던 상자와 리본 하나도 버리지 못했고, 스무 개가 넘는 상자들을 가방에 담아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해외여행을 갈 때는 빈 집을 못 믿어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두었고, 아이가 태어난 뒤 다섯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가장 먼저 챙긴 건 금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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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도시'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당장 "여러분이 도시를 만들어보세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막막하죠. '도만사(도시를 만드는 사람들)'는 답변이 막막한 이유를 '의지'가 아니라 '경험의 공백'에서 찾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를 다양한 관계와 방식으로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바꿀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만사는 거창한 도시 계획 대신 '팝업'을 택했습니다. '도시 문제를 해결하자!'가 아니라, '가볍게, 자주, 재밌게, 일단 만나보자!'라고 말합니다. 북성수 한편의 7평 공간은 어린이의 놀이터가 되기도, 어르신이 전 부치고 낮잠 자는 평상이 되기도, 첫 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미술관이 되기도, 강연이 열리는 공론장이 되기도 합니다.

팝업은 작지만, 효과는 큽니다. "우리 동네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네?" 한 번의 경험이 도시를 '남이 정해둔 공간'이 아니라 '내가 다시 써볼 수 있는 곳'으로 보이게 만들거든요. 도시계획/건축 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주민들이 서로 다른 주제로 교차하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설계합니다. '같이 놀아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그곳에 있습니다. 지난 1월 7일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한 도만사 사무실에서 도시 경험을 설계하는 소셜디자이너, 조영하 대표를 만났습니다.



도면 밖으로 나온 도시계획가, 동네의 '틈'을 발견하다

- 이 멋진 공간이 원래는 이발소였다고요? 어떻게 도만사를 시작하고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건가요?

"정말 가볍게 '일단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저희 부부는 건축가라 함께 건축사 사무소를 운영해 왔어요. 미국/홍대 등 다른 곳에서 활동하다, 성수동에는 2019년에 정착하게 됐어요. 저희 건축사 사무실 바로 맞은편에, 출퇴근길마다 늘 눈에 밟히는 가게가 하나 있었어요. 50년쯤 된 상가 1층에 있는 7평 남짓한 공간이었죠. 원래 오래된 이발소였다는데 하루아침에 폐업하고 사라졌대요. 6개월 동안 공실이었는데, 어느 날 그 자리에 붙은 임대 전단이 제 눈에 딱 걸린 거죠.

마침 환기가 필요하던 시기라 눈에 띈 것 같아요. 건축 일은 대부분 의뢰인 중심으로 돌아가요. 예산과 방향이 정해져 있고, 사무소는 그 조건을 충실히 수행하는 방식이죠. 답답하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도시가 전문가만의 일이 아니라고 믿는데, 왜 내 일상엔 주민이 없지?'

그래서 더 가볍고 자유롭게, 도시에서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는 커뮤니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만남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문화예술이 가장 적합하다고 봤고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만날 공간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죠. '우리가 하고 싶은 거, 우리가 먼저 시도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2020년 2월, 북성수 광나루로에 위치한 이 공간을 임대하고 '도만사'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 일터와 삶터 모두 성수동이라 익숙한 동네일 텐데. '도만사' 운영자의 시선으로 보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도 있던가요?

"성수동을 '핫플레이스'로 말할 때 떠올리는 풍경은 대부분 팝업스토어나 카페, 식당이 모여있는 연무장길 카페거리예요. 제 생활권은 영세 공장과 오래된 빌라가 밀집된 곳이라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도만사 이전에는 주민들과 직접 연결된 경험이 많지 않았어요. 사는 데 불편함은 없지만, 종종 묘하게 '삭막하다'라는 느낌이 들곤 했죠.

공간을 열고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성수동의 격차가 체감되기 시작했어요. 저희는 늘 문제를 정의하고 시작하지 않아요. 불편하거나 궁금한 것을 먼저 실행해 보고, 그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석해 나가죠. 도시디자인 스튜디오 비들과 협업 진행한 '플레이시티(PLAYCITY)' 프로젝트도 '왜 우리 아이는 항상 옆 동네 아파트까지 가서 놀다 올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만약 이곳에 놀거리가 충분하면 친구를 초대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만사 유리문을 완전히 개방하고 정글짐 놀이터를 만들었어요. 신기하게도 아이들에게 '정글짐'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보자마자 꼭대기까지 척척 올라가더라고요? (하하). 어르신들은 잠시 쉬어가는 의자로 쓰시기도 하고요. 우리 동네에 놀러 오라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변화를 느꼈어요.

물론 이런 작은 경험으로 당장 도시 문제를 해결한다고 장담하긴 어렵죠. 다만 도시의 불균형을 조금씩 메워가는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 '경험'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내 동네를 즐겁게 써본 경험이 있어야 '이 동네에 뭐가 부족한지', '어떻게 바꿔볼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돌봄과 놀이를 '내 일'로 말하는 시민은, 결국 그런 경험에서 시작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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