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포항 지진으로 철거된 아파트, 그 자리에 들어선 도서관

"이대로 끝인가 보다."

2017년 11월 15일,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땅이 울렸다. 단순히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집이 통째로 들썩였고, 발밑에서 올라오는 진동은 몸을 그대로 밀어 올리는 듯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2017년 포항 지진이 발생한 날, 나는 남편과 함께 급히 아이를 데리러 나갔다.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은 병설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전교생이 대피해 있었다.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모여 있었고, 어른들 역시 상황을 가늠하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우리는 식탁 아래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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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국가폭력에 대한 단호한 책임 규명 의지를 밝히며 제주 4·3 유족과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송 위원장은 제주 4·3을 "우리 사회 과거사 정리의 앞선 모범"이라 평가하며 국가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와 가해자 서훈 취소 등 근본적인 과거사 해결 방안에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밝혔다.

송 위원장은 2일 오후 4시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4·3특별법 개정 촉구 유족·시민 결의대회'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송 위원장은 이날 발언대에 올라 4·3의 비극이 1948년에 머물지 않고 한국전쟁 전후 학살과 형무소 수감 등으로 이어진 점을 짚었다.

그는 특히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속 강정심 할머니의 삶을 언급하며 "4·3은 이후 발생한 전국의 모든 국가폭력과 단단히 이어져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주도민들이 진실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결과, 4·3은 진실 규명과 국가 사과, 명예 회복과 배보상 등 과거사 정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묵묵히 앞서 걸어왔다"며 4·3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 모델이 되었음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송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에서 밝힌 '국가폭력 범죄의 공소시효·소멸시효 배제' 및 '4·3 왜곡과 폄훼에 대한 대응', '가해자 서훈 취소 근거 마련' 등의 의지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환영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가해자가 가해 행위를 통해 얻은 명예와 이익은 반드시 회수되어야 하며, 책임을 밝히지 못하는 진실 규명은 공허하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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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설명 맞는데요..... 최저형이 10년 이상인데요....."

자신의 전화통화 음성이 공개되면서 회유·압박 수사 의혹에 휩싸인 박상용 검사가 지난 1일 페이스북에 짧게 올린 반박문이다. 2023년 5월 25일 이화영 전 부지사의 변호인 서민석 변호사에게 했던 "생짜 부인을 해서 지금 입장으로 계속 간다, 그러면 저희는 뭐 한 10년 이상 구형을 할 거고 당연히" 발언이 단순 법률 설명이었다는 반론이다.

하지만 통화 상대방이었던 서 변호사는 31일 오마이TV '이병한의 상황실'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자 "저한테요?"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헛웃음을 지으며 "박 검사가 (법조인 경력으로는) 저보다 한 15년쯤 후배"라며 "저한테 법률 설명할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설명'이 아니라 '압박'이라는 뜻이다.

"협조 안 하면, 법정형이 (최저) 10년인데 10년 이상 구형할 거다, 이런 내용 아닌가? 저는요, 부패사건 전담재판부 재판장 2년 했거든요. (단순 법률 설명이라면) 저한테 저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법연수원 교수를, 형사법만 3년 가르쳤다. 그런 내용을 박 검사가 잘 알 거다. (제게) 법률 설명할 이유가 없다."

"나에게 법률 설명? 나 사법연수원 교수였다"


서 변호사는 지금까지 공개된 모든 '박상용 통화 파일' 속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날 방송에서 서 변호사가 해설한 통화 파일은 2023년 5월 23일분 3개, 같은 해 6월 19일분 2개, 총 5개다.

그는 "검사는, 수원지검은 애시당초 이재명 대표를 잡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한 것"이라며 "(5월 25일 통화 전에) 이미 이화영 부지사한테 듣기로, 검사가 네 가지 제안을 했다고 했다. 압박 두 가지, 회유 두 가지"라고 얘기했다.

두가지 압박은 ▲ 아내, 아들 등 가족에 대한 수사와 구속 ▲ 이해찬 전 총리 등 주변인과 동지들에 대한 수사였고, 회유 두가지는 ▲ 개인비리 혐의로 이미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중이던 법인카드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 주장을 하더라도 검찰이 크게 반박하지 않고 ▲ 제3자 뇌물 혐의에서 이 전 부지사를 주범이 아닌 종범으로 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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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을 입으면 인간성을 벗어 버린다."

1982년 새해 연휴, 당시 문교부장관 이규호는 교복자율화를 전격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듬해 3월 2일부터 중·고교생들의 교복을 자율화한다는 것이었다(대학생 교복도 1982년 자율화되었다). 나폴레옹이 '제복의 효율성과 통제력'에 힘주어 했던 말을 이규호는 '인간성을 억압하는 굴레로서 제복'에 방점을 찍어 고쳐 말한 것이었다. 사실상 근대 교육 개시 이래 최초이자 마지막(?) 정부 차원의 '교복 폐지-사복 착용' 허용이었다.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정책' 중 하나였던 교복자율화 조치의 취지는 "교복이나 머리 모양의 획일화로 인한 비인간화 현상을 불식시키고 자유복과 교복을 번갈아 입는 이중적 생활에서 해방시켜 자율적인 민주시민으로 육성하고자 함"이었다. 1979년 12월 김옥길 문교부장관은 "중·고교 교복, 모자 머리 모양 자율화 방침"을 발표했지만, 사회적 논란 속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1979년 12월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문교 당국자는 21일 '모든 교육 행정은 자율화해야 한다'는 신임 김옥길 장관의 특별 지시에 따라… 중·고교생의 교복 교모의 자유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1일)", "내년(1980년) 새 학기부터 중·고등학생들의 교복과 교모 및 머리 모양에 대한 선택권을 학교장에게 맡기기로 한 문교부의 전진적인 구상(<경향신문>, 1979년 12월 22일 자 사설)"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정비해 다시 전격 추진한 것이 1982년 교복자율화이다.

이에 따라 서울시교육위원회(지금의 서울시교육청)에서는 '교복자율화 시범학교'를 지정했다(중학교 12개 연서중, 당산중, 영동중, 숭인여중, 용산여중, 동대문중, 남대문중, 배재중, 동명여중, 영일여중, 성신여중, 숙명여중, 고등학교 8개 성동고, 여의도고, 창덕여고, 영등포여고, 중앙고, 금란여고, 정신여고, 영동고). 그해 8월에는 '학교 밖에서 사복 착용 금지'를 규정한 교칙 조항도 삭제했다. 중·고교에서는 '사복 입는 날', '자유복 입는 날', '교복 없는 날' 같은 날을 마련하여 교복자율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나 이 같은 "전진적인 구상"은 1983년 3월부터 1986년 9월까지 불과 '3년 6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교복자율화는 교복을 다시 입는 것으로 학교장들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한 취지가 아님을 분명히 하여 시행에 착오 없도록 할 것.", "학생의 복장은 지역 실정에 따라 알맞게 입히고, 제조업자들은 경쟁력 제고를 통해서 질 좋은 옷을 공급토록 할 것", "가능하면 현행대로 교복을 입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임" 등과 같은 '대통령 각하 지시사항(1986년 1월 29일 실시한 문교부 업무보고 자료)'을 확인할 수 있으나 1986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교복자율화는 폐지되었다. 2학기부터 '학교장 재량' 형식으로 교복이 부활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교복자율화는 그렇게 끝났다. 1994년에는 당시 교육부가 전국 시도 교육감에게 "국가 기강 확립을 위해 교육 질서를 강화하라"라며 "외출 시 교복 착용"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학교 밖에서도 교복을 일상복처럼 입으라는 명령이었다. 이후 교복 체제는 2026년 현재까지 아주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

상품 내걸고 학생들끼리 서로 단속하게 하는 학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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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돼지'. 요즘 예능에 자주 등장하는 윤남노 셰프의 별명이다.

JTBC 일요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윤남노 셰프는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와 함께 '쌍뚱이' 막내 라인을 맡고 있다. 그를 향한 시청자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보통 다른 셰프들에게는 작은 맛보기 접시에 음식이 나오지만, 윤남노 셰프 앞에는 뚝배기나 후라이팬이 통째로 놓인다. 박은영 셰프가 "출연료 안 나온다며?" 하고 묻자 "이번 주부터 안 나온대" 하고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모습까지, 그는 정말 음식에 진심이다.

김풍만 만나면 지고 마는 '공풍증'에 시달리던 '무별장수' 시절을 지나, 오랜만에 승리를 거두고 환호성을 지르던 모습, 대결 중 정호영 셰프가 자신의 요리를 방해하려 건넨 고기 접시를 얼떨결에 받아들고 허겁지겁 먹다가 "뭐해, 요리해!"라는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던 순간, 게스트 이수지의 아바타가 되어 조리대까지 뛰어가 요리하다 남은 식빵 테두리를 모아 배달하던 장면까지.

SBS <정글밥2-카리브 밥>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수영이 잡아온 커다란 황새치를 들고 해변을 뛰어다니며 "게임기 선물 받은 기분이에요"라며 환호성을 지르던 그의 얼굴에는 신남이 가득 차 있다.

화면 속 윤남노는 마치 웃는 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기쁨이 먼저 몸으로 튀어나오는 사람처럼. 그 기쁨은 종종 말보다 먼저 소리로 튀어나온다. "우헤헤!", "꺄하하!", "와하하핫" 같은 웃음소리는, 그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반복된다.

하지만 윤남노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불안핑'이었던 윤남노 셰프


플릭스 <흑백 요리사> 시즌 1의 그는 다소 조급해 보였다.

'요리하는 돌아이'라는 캐릭터 안에 스스로를 밀어 넣은 사람처럼 어딘가 급하고 흔들리는 느낌이 있었다. 탈색한 머리와 강한 인상, 쉽게 웃지 않는 표정, 신경질적인 말투. 팀전에서 시간에 쫓기며 불안감은 극에 달했고, 결국 '불안핑'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그를 다시 보게 된 건 <흑백 요리사> 시즌 1 '인생 요리' 미션에서였다. 윤남노는 본인의 요리, '못난이 양파로 만든 어니언스프'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못난이입니다."

강한 눈빛과 강한 인상, 항상 불만에 차 있는 표정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깡패 같다는 말도, 싹수없어 보인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손님들에게 외면 당한 적도 있었다.

"저 셰프님은 설명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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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경선에 출마한 김동연 후보 캠프가 김은혜 국민의힘 국회의원에게 선거대책위원회 임명장을 발급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의힘 김은혜 의원은 2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정말 괜찮으십니까?"라는 글과 함께 김동연 후보 경선 선거대책위원회 임명장을 공개했다.

공개된 임명장에는 김 의원이 '김동연 선거대책위원회 특보'로 임명됐다는 내용이 담겼으며, 임명일자는 2026년 4월 2일로 기재돼 있다.

김 의원은 임명장과 함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도 공개했다. 해당 메시지에는 임명 사실 안내와 함께 온라인 링크를 통한 임명장 발급 절차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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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는 정치적 비중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만한 죄목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쉽게 걸릴 수 있는 죄목이다. 대중과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이 파괴돼 대중의 지위가 취약해지면 누구라도 이 구렁텅이에 떨어질 수 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 위원회'가 펴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1948년 12월 3일~27일에 12차례 열린 계엄고등군법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군법회의에서 민간인 871명에 대해 일률적으로 구(舊)형법 제77조 위반 내란죄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고 설명한다.

구형법으로 불리는 일본 형법 제77조는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토를 참절하거나 기타 조헌(朝憲)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하여 폭동을 한 자"를 내란죄로 처벌했다. 현행 대한민국 형법 제87조에 나오는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이 일본 형법에서는 "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표현됐다. 일본 조정의 법률에 맞서는 것이 '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규정했던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4·3 재판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내란죄 규정에 저촉돼 유죄 선고를 받은 제주도민들이 1948년 12월의 3주 동안에만 871명이었다. 위 보고서에 의하면, 그중 100명은 사형선고, 102명은 무기징역을 받았다. 내란죄를 덮어쓰기도 쉬웠고 그 때문에 처형되기도 쉬웠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통계다.

그렇게 살벌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란범이 된 소년이 1948년 당시 15세였던 강택심이다. 제주 북서부 해안과 한라산의 사이에 애월읍 금덕리가 있었다. 이곳에 살던 강택심은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는 참변을 겪으면서부터 자신을 내란범으로 몰아가는 상황에 휘말려 들어갔다.

마을이 불탄 뒤 외가가 있는 애월면 하귀리에 피신한 그는 거기서 또 다른 재앙을 입었다. 그에 관한 언론보도들에 따르면, 40대 초반인 그의 어머니는 '산간 폭도'들을 도왔다는 모함을 받고 끌려갔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의 누나와 자주 다툰 일로 인해 앙심을 품고 있었던 임시직 경찰보조원이 모함의 장본인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끌려간 뒤 총살됐다. 총을 든 쪽으로부터 "도망가라"는 말을 듣고 등을 돌렸다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빨갱이 아님을 증명하려 자원입대


참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강택심 본인도 어머니의 운명을 따라갔다. 강택심을 겨냥해 "일본군이 버리고 간 총알을 주워다 빨갱이에게 줬다", "무장대에게 군자금 10원을 제공했다"는 등의 거짓 제보가 있었다. 16세가 된 1949년 초반에 그는 그런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석 달간 고초를 겪었다. 소 힘줄 채찍과 몽둥이로 매일 얻어맞았다.

그러고 나서 석방될 때였다. 그때야 자신에게 유죄가 선고된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해 4월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내란방조죄 등으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된 사실을 경찰서를 나오면서 알게 됐다. 본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궐석재판이 진행됐던 것이다. 자신이 일반 전과자가 아닌 대역죄인이 되어 있는 현실을 16세 소년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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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시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맞춤형 전략을 추진한다.

광주시는 지난 1일 방세환 시장 주재로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가까이에서 촘촘하게!'를 구호로 한 분야별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시는 지난해 지역 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관급공사 등 계약 625억 원, 국책사업 내 지역 업체 이용 136억 원, 민간 대형 공사장 지역 자재 소비 508억 원, 농산물 직매장 판매 87억 원, 지역화폐 발행 1천833억 원 등의 실적을 기록했다.

이를 통해 음식점, 학원, 일반유통 등 지역 내 소비 확대 효과가 나타났다고 시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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