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태양 "민효린 안 만났으면 결혼 생각 안 했을 것"
그룹 '빅뱅' 멤버 태양이 최근 부인인 배우 민효린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태양은 지난 4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다큐멘터리 '백야(白夜) | 화이트 나이트(WHITE NIGHT) (태양이 지지 않는 밤)' 6회 '크리스털 클리어(Crystal clear)'를 올렸다. 태양은 이 영상에서 민효린을 향한 진심을 털어놨다. 2017년에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사람이 "결혼해야지"라고 말하자, 태양은 "나는 그럴 마음으로 만났다. 사실 우리는 예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며 "나도 그렇고, 여자친구도 그렇고 결혼을 전제로 하지 ...
    
초등학교 3학년인 손자가 한국 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큰 소리로 인사하고 나가는 손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남다른 감회가 밀려온다.

손자는 지난해 말까지 중국에서 살다가 방학 때 잠시 한국에 왔었다. 한동안 먹지 못한 한국 음식이 그립기도 하고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정도 나누기 위해서였다. 또 중국에서 배우지 못한 여러 공부도 할 겸 방학마다 늘 귀국하곤 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찾아오면서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달, 두 달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행여나 하고 대기하는 기간이 3개월이 넘어가면서 딸의 가족은 삶의 진로를 바꿔야 했다. 이참에 한국으로 돌아와야겠다는 결정을 한 후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딸의 가족은 아예 우리 집에 전입신고도 했다. 손자도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전학을 해 놓고 개학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교육부에서는 등교를 미루고 온라인 개학부터 했다. 손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 갈 날을 기다리며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지만 한국 학교생활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고 학교에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손자는 어느 날 눈물을 주르룩 흘리며 말했다. 

"나 중국 우리 집 가고 싶어요. 여긴 친구도 없고 놀 거리도 없어요."

손자는 돌이 막 지난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8년이란 세월 동안 그곳에서 생활해왔다. 어린 날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익숙한 장소가 그리울 법도 하다. 

게다가 원래는 방학 때 잠시 한국에 오는 일정이어서 장난감도 모두 중국에 있는 집에 놓고 온 터였다. 당장 즐길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없으니 일상이 지루한 데다, 갑자기 변화된 삶의 방식 또한 낯설고 힘겨웠던 게 아닐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 마음은 얼마나 짠했을까 싶다.

손자의 첫 등교

드디어 오래 기다려온 날이 왔다. 지난 3일, 초등학교 3학년의 등교가 시작됐다. 손자와 사위, 딸 모두 들뜬 마음으로 수업 준비를 하고 함께 학교에 갔다.

본가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축하 전화를 하셨다. 남들이 알면 웬 요란일까 싶어도 우리 집은 특별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 학교에 가는 날이니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친구는 잘 사귈까, 적응은 잘할까... 한 번도 한국에 있는 학교에 다녀본 경험이 없는 손자를 보며 가족 모두 한마음으로 신경을 썼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 모두가 평소에는 몰랐던 일상의 소중함을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으로 발이 묶인 채 몇 개월을 집에서 내복만 입고, 조그마한 화면으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집밥만 먹었으니, 매우 답답하고 지루했으리라.
 
 
"학교 다녀왔습니다!"
 
오후 1시가 지나자 손자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목소리가 씩씩하다. 새롭게 시작한 일상이 좋은가 보다.

"할머니, 저 배고파요! 밥 더 주세요."

한창 자랄 때여서 그런지 학교에서 점심 급식을 먹었는데도 금세 배가 꺼지나 보다. 손자에게 밥을 차려준 뒤 이것저것 물었다.​

"오늘 처음 학교에 다녀온 소감은 어떠니?"
"뭐가 뭔지 아직 모르겠어요. 지켜야 할 규칙들이 너무 많아요."
"같은 반 친구들은 어때?"
"모두가 새로 온 저를 보는 느낌이에요."

     
중국 학교만 다녀봤기에 달라도 너무 다른 문화를 한 번에 극복하긴 어려울 테다. 그러나 손자는 새로운 환경에 천천히 적응하며 인생의 변환점을 잘 헤쳐나갈 것이다. 훗날 어른이 되어 기억하는 오늘이 손자에게는 잊지 못할 날이 되지 않을까.

손자의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다

"친구 데려왔어요!"

등교 두 번째 날, 손자는 하굣길에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다. 손자는 살면서 또래 친구는 처음이라 했다. 중국에서 한국인이 많지 않은 곳에 살다 보니 한국 친구는 늘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어렸다고.

식구들 모두 반가워했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현관으로 뛰어나가 환대할 정도였다.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간 손자와 친구는 웃음소리가 밖까지 새어 나올 정도로 즐거워하는 분위기였다.

정말 다행이다. 잘 적응하리라고 믿었지만 이렇게 활발히 생활해 주다니 참 감사하다. 부모가 곁에 있지만 결국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자기 몫인 것이다.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사위는 "정말 감사한 일이네요" 하면서 기뻐한다.

아이들이 동심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뛰어놀 수 있는 일상이 이어지길 기도한다. 더는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지 않기를 바란다. 손자의 기뻐하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펼쳐질 뉴노멀은 신종 감염병과 마스크가 아니라 가족의 소중함과 소통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6월 중하순에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다 엄마를 위한 선택이었다. 일단 예약은 했지만 사실 여전히 고민된다.

어느 날 동생이 엄마를 모시고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엄마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반대했다.  

"코로나가 기승인데 무슨 제주도로 여행을 가."
"그건 그래… 그렇지만 엄마가 가고 싶어하잖아."

 
동생과 나는 그렇게 며칠 동안 갑론을박을 했다. 
 
나는 가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엄마가 가고 싶어 한다'라는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최종적으로 엄마에게 한 번 물어보았다. 정말 제주도에 가고 싶으냐고. 
 
"죽기 전에 한 번 더 가면 좋지." 
 

더 이상의 말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일단 항공권을 예약했다. 엄마의 '죽기 전에…'라는 말이 제일 무섭다. 그러니까 이 비행기 표는 사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후회하기 싫어서. 

왜 엄마는 매 순간 '마지막'을 생각할까
 
 
엄마와 마지막으로 제주 여행을 다녀온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딱 2년 전 이맘때였다. 막냇동생이 내게 말했다.
 
"언니, 우리 6월에 제주 가기로 했어. 일주일 동안."
"뭐라고? 나한텐 물어보지도 않고? 나 무조건 가야 하는 거야?"
"응, 무조건. 엄마, 큰언니,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이유는 '엄마가 제주도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와 세 자매… 이런 멤버 구성은 처음이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한 달 반을 기다렸다. 

드디어 여행 당일. 손녀가 사준 예쁜 모자를 손에 들고 있는 엄마는 한껏 들떠 계셨다.
 
그해 팔순이 되신 엄마는 "내가 살아서 또 제주를 가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라고 큰언니에게 말했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슬프고 가슴이 아렸던지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 뻔했다. 왜 엄마는 매 순간 '이게 생의 마지막이야'라고 하시는 걸까.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실 거라고 짐작하면 늘 마음이 저린다. 
 
그해 우리는 느린 제주여행을 했다. 천천히 걷고, 많이 먹고, 많이 웃고. 일정과 식사 등 대부분을 엄마에게 맞췄다. 함덕 해변에 넷이 쪼르륵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본 것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물론 중간중간 짜증 나는 일들이 왜 없었겠는가. 
 
지난 제주 여행에서는 에피소드가 참 많았다.
 
큰맘 먹고 장만한 라이카 카메라를 삼양 검은모래 해변에 처박고 '멘붕'에 빠졌던 일, 큰언니가 대정의 한 식당에 휴대전화를 두고 와서 부랴부랴 다시 찾으러 가야만 했던 일... 공항에서는 베터리와 맥가이버 칼 때문에 가방 검사를 받고 다시 짐을 꾸려야만 했다.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닌데 공항에서는 매번 크고 작은 실수가 생긴다. 호텔을 두 번이나 옮겼고, 엄만 배탈이 나서 고생을 했다. 차마 할 수 없는 얘기도 수두룩하다. 여행지에서 처음으로 부재자 투표도 해 보았다. 
 
네 모녀가 저녁에 호텔 방에서 고스톱도 쳤다. 우도해변의 한 카페에서 꾸벅꾸벅 졸던 한가로웠던 시간도 생각난다. 곽지해변의 해 저무는 풍경은 또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럼에도 여전히 고민하는 이유
 
 
엄마와 이런 말도 주고받았다. 

"엄마, 이번 제주 여행 너무 행복했어. 내년에 우리 또 오자."
"그래."


김영갑갤러리에서는 엄마에게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엄마랑 함께 한 이번 제주 여행 너무 행복했어. 사랑해요.'
 
그 엽서는 쓸 때도 쑥스러웠지만, 집으로 배송된 엽서를 받고 읽었을 때는 더 쑥스러웠다. 그렇지만 엄마의 싫지 않은 기색을 보면서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엽서를 엄마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표현을 많이 하라고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어쩌다 표현을 해도 그 쑥스러움을 견디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 예매한 비행기 표도 엄마에게 보내는 사랑 표현이나 다름없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또다시 늘고 있는데 이대로 가는 게 맞을까. 죽게 전에 또 가고 싶다는 엄마의 바람을 이뤄드리고 싶으면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망설여진다.

무엇이 옳은 선택일까. 지금이라도 항공권을 취소해야 할까. 엄마와의 약속과 생활 속 거리두기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내가 사는 지역 카페에 "어떡하죠? 큰일 났어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그 제목 아래 달린 댓글이 수십 개... 무슨 일일까? 싶어 나도 클릭해 보았다. 내용인즉, 싸이월드가 지난달 말 폐업해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전부 잃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2000만명에 달하는 회원들의 추억은 복구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예전 기사에서 해당 기간 동안 싸이월드의 사진을 백업하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다음에 해야지... 다음에...'라고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진짜 싸이월드가 폐업을 하고 그 안에 담긴 추억이 모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작에 저장해놓을 걸...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왔다.
 
나에게 싸이월드는 단순히 사진저장소만은 아니었다. 싸이월드 전성기 시절은 나와 남편의 연애 전성기이기도 했다. 홈피 내 비밀 다이어리라는 카테고리를 설정해 남편과 수많은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남편이 잠시 해외로 나갔을 때 그곳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움을 말했다. 얼마나 절절하고 애틋했는지... 지금 와 생각하면 피식하고 웃음만 난다. 엄마와 아빠의 연애 시절을 묻는 아이들에게 "네 아빠가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어"라며 증거로 내놓던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역 카페에 달린 댓글들도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인 듯했다. 미리 백업을 마친 후 사진을 앨범으로 만든 이는 모두의 부러움을 샀고, 나처럼 백업을 못 한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싸이월드가 자신과 남편을 맺어준 중매인이라고도 했다. 남편이 홈피 사진을 보고 쪽지를 보내왔고 그것을 계기로 만난 것이 결혼까지 이어졌다며 싸이월드 폐업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또 다른 이는 국민 청원까지 넣었다며 동참해달라고도 했다. 모두 자신들의 추억을 간절히 지키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늦었지만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비번 찾기부터가 난관이었다. 계속 비번을 다시 확인하라는 메시지만 떴다. 내 청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누군가 암호를 대라고 하는데 난 그 암호를 풀지 못하는 꼴이었다. 기간 내 암호를 찾지 못한 벌로 나는 이제 그 시절을 선명한 텍스트와 사진이 아닌 희미한 기억으로 더듬어야 하는 벌을 받게 된 듯했다.

싸이월드는 단순한 SNS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운명의 시작이었고, 누군가에겐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겐 잃어버린 감성의 집합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사진을 찍고, 순간을 기록하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데 공을 들인다.

그래야 힘든 순간이 왔을 때 그 기억들을 동력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이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덮고 오늘의 페이지를 소중히 펼쳐야겠지만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희미한 기억이나마 그 시절의 나의 젊음, 사랑, 추억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려 한다. 내 기억에서만큼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간직될 수 있도록 말이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사람들은 가장 먼저 관광지에 오지 않았다. 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는 박물관, 국보가 있는 야외 유적지, 풍경이 아름다운 자연공원에 예정되어 있던 교육과 예약, 견학이 줄줄이 취소됐다.
 
[관련 기사 : 어르신과 2인 1조로 문화관광해설사 일을 하다 겪은 일]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바이러스 시대, 해설사 활동 방침을 공지했다.

① 유관기관 비상 연락체계 유지 및 상황 발생 시 즉각 대응
② 해설사 위생관리 및 해설 지역 감염예방 관리 철저
③ 해설사 유증상자 발생 시 사업 참여 중단 및 자가격리
④ 안내소에 손소독제를 비치, 개인위생 철저, 코로나19 예방행동수칙 포스터 부착
⑤ 대면 간 거리 2m 두기 방침을 유지, 마스크를 착용하고 마이크를 활용한 해설
 
 
여기에 한 가지 더해서, 내가 속해 있는 경상도 지자체에서는 '지역 내 확진자 발생 시 해설 중단 계획'을 알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6월 근무를 시작했다. 2월부터 5월까지 4개월을 쉬고 나서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고 마이크를 끼고 2m 거리를 유지한 채 해설을 시작하려는 순간, 관람객들은 괜찮다며 해설을 듣지 않았다. 어느 순간, 해설보다 소독과 안내를 더 열심히 하게 된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코로나19 시대에는 문화재를 해설해 주는 사람인 해설사라는 행위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해설사는 그야말로 밀폐된 공간에서 비말을 전파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었다. '증상-동선-치료' 등 시간별로 38쪽에 이르는 기록을 남겨 화제가 된 1129번 서울시 문화해설사 확진자도 이와 같은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에 꼼꼼하게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을까.
 
 
코로나19 전에는 해설을 들으려는 목적이 교육, 알아가는 재미였다면, 코로나19 시대에 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비말이 튀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 되어 버렸다. 또한 이미 관광업계는 가이드형 관광보다는 스스로 찾아다니는 관광으로 변했다. 해설사가 없어도 스마트폰으로 녹음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오디'라는 어플도 이미 나와 있다.
 
방역 지침이 공지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내 확진자가 발생했다. 해설사 활동은 잠정적으로 중단됐고, 활동 연기가 몇 달 동안 이어졌다. 해설사는 프리랜서의 성격이 강한 직종이다.

1회 해설에 따라 급여를 받기도 하고, 지자체에 소속되어 있을 경우에는 소정의 밥값과 교통비로 구성된 실비를 받는다. 이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투잡을 위한 직장인, 경험을 얻기 위한 대학생, 봉사를 위한 장년층, 관광업계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등.

나는 대학생의 신분으로 경험과 소정의 아르바이트 비용을 얻기 위해 해설사 일을 하고 있지만, 이곳에도 생계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해설사 외에도 여러 가지 강연과 행사, 가이드를 병행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예정되었던 강연, 행사, 여행업 모두 무기한 연기되어 버렸다. 문화 강연과 지역 축제 행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프리랜서들은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고, 잠정적 중단이란 말 앞에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다.
 
 
정부재난지원 대책이 발표된 초기에는 프리랜서를 포함시키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해도,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신청할 수 없었다. 4대보험이 없다는 건 정부 지원 대책에서도 순위가 밀린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여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져서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본 학습지 교사와 같은 특수고용직(특고) 종사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 무급휴직자를 위한 '코로나19 긴급 고용안정 지원금' 온라인 신청 접수가 6월 1일부터 시작됐다. 고용보험 미가입자도 가능하다는 말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고 '생활 속 거리두기'가 시작됐다. 내가 있는 지역의 해설사 활동도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됐다(지역 감염에서 안심할 수 없는 지역은 아직도 무기한 해설 활동 중단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손소독제로 소독을 하고, 마스크를 꼼꼼하게 착용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대면 간 거리 2m 두기 방침을 유지하고, 관광객들의 급격한 몰림 현상을 방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관광객들에게 해설을 듣는다는 일은 위험한 일로 비친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팸플릿을 통한 언택트 관광 안내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해설보다는 입장하기 전에 체온을 재고, QR코드를 요청하고, 실내 밀집도를 고려한 거리두기 활동이 주가 됐다. 비대면과 집콕이 유행인 시대에 비말을 퍼뜨리는 문화해설이 무슨 일인가. 이제 관광은 조금 서글프고 위험한 행위가 되고 말았다.
'49재, 고운이가 떠난 지 벌써 이렇게 지났구나.' 막내 시누이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아직도 그의 부재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희고 고운 얼굴에 항상 따스한 미소를 띠고 있던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현명하고 착했던 이.

나는 종종 "내가 나이는 더 많지만, 아가씨가 언니 같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모든 이에게 친절하다 보니 본인의 마음이 고단했던 걸까? 암이라는 병으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젊은 나이에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나갔다. 너무 아깝고 안타깝다.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이 황망한 이별 앞에 어떤 이유라도 찾고 싶어 했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너무 착해서, 너무 참아서 등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아가씨의 삶을 안타까워 하는 말들이지만 결국은 왜 그렇게 착하고 성실하게 살던 사람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하는 마음 아픈 질문이었다.
 
흔히들 우리는 불행을 마주하면 하늘의 섭리나 하느님의 깊은 뜻을 운운하며, 새옹지마라거나 너에겐 이 고난을 극복할 힘이 있다거나 아니면 하느님이 너무 사랑하셔 그를 먼저 데려갔다는 등등의 위로를 하거나 듣는다.

하지만, 건강을 잃어 회복 불구 상태가 되거나 배우자나 자식의 변고를 지켜봐야 하는 경우나, 평생을 일궈온 지위나 재산을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잃어야 하는 경우 등등. 세상이 공평하다면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이 정말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한 하늘의 섭리일까?
 
답답한 마음에 오래 전 읽었던 책을 다시 찾아 들었다.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제목의 책이다. 지금은 절판된 책이지만, 제목이 그렇게 내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유대교 랍비인 종교인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것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들이 조로증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질문과 탐구가 시작된다. 저자는 우리가 겪는 불행이 하나님의 섭리일까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종교인이 쓴 불행에 대한 탐구이지만 나는 이 책의 내용이 하나님이나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없는 나는 이 책을 우리가 생활 속에서 흔히 던지는 질문,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던지는 절규에 대해 해답을 찾고자 하는 우리 삶에 대한 성찰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책에도 '하느님을 변호하거나 하느님에 관해 설명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삶으로부터 상처받은 한 종교인으로서 병마와 죽음, 부상이나 소외, 절망 등으로 상처받은 사람들과 이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이보다는 좀 더 나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뿐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우리가 당하는 갑작스러운 불행에 대해 "왜 그럴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하는 원인에 천착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불행은 누구의 뜻도 심지어 하느님이나 하늘의 뜻도 아닌 불가항력적인 현상이라는 거다.

그러기에 누군가의 행동들을 연말 정산하듯이 이런저런 공식에 의해 계산해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찌질한 하느님을 떠올리지도 말고, "내가 좀 더 잘 해야 했다.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라는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도 갖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보다는 불행이 발생한 이후에도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들과 그를 지켜보아야 하는 주변인들이 어떠한 자세여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함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당신의 친구들과 친지들이 기도했다. 유대교인, 가톨릭교인, 그리고 개신교인 등 모두 기도했다. 당신이 너무나도 처절하게 외롭다고 느낄 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위해 슬퍼하고 당신과 함께 비통해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물론 너무 힘들 때는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으로도 위로가 안 될 때가 있다. 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와의 정서적 연대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게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상처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상처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극복할 힘을 얻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또 삶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비극을 뒤집어 놓을 만한 기적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주위에서 사람들과 하느님을 발견했고 이 비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이 기도가 응답을 받은 한 예라고 말하겠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빠져있는 이에게, 엄마를 잃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 조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어린 시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의 애도 방식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고이 보내려 한다.
내가 사는 부천시는 평생학습도시다. 2003년 평생학습도시로 선정된 이후로 시스템이 잘 갖춰진 기초지자체로 자부하고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학습센터와 2개의 시민학습원, 10개 광역동의 학습 광장이 만들어지고 있고, 73개의 시민 학습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시민이 참여하는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부천시 지역사회교육운동에 이제 나도 참여하게 되었다.

시에서 여러 가지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난 1년간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알고 있었다. 다만 정확한 체계와 운영 시스템까지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부천시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활동가로 참여하려면 필수 과정이라고 해서 무작정 덤빈 상황에 가까웠다.
 
 
1월에 신청한 평생학습 활동가 양성 과정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애초에 2월에 시작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가, 코로나19로 인해 3월로 다시 4월로, 또 6월로 미뤄졌던 것이었다. 

드디어 강의가 시작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싶었는데, 다시 문자 알림이 왔고 온라인 교육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과정이 시작되기 하루 전 온라인 교육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사전 리허설도 진행된다고 했다.

총 4주, 8회 차의 온라인 강의를 잘 마칠 수 있을까. 우선, 간신히 검색 기능만 남아있는 컴퓨터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다른 컴퓨터를 수배해야 했다. 일단 휴대폰으로 보내 준 설명대로 앱을 깔고 실행을 해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영상이 뜨는 것까지는 같이 시작하게 된 지인들과 시험 운영을 통해 확인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이 작아 강의 내용이 뜬다면 보이기는 할까 시작도 전에 걱정만 커졌다.

드디어 온라인 리허설. 담당자가 보이고 소리가 들렸다. 강의를 맡아 주관하시는 분은 주고받는 쌍방향 수업을 위한 기호를 알려주셨다. 알았으면 OK 사인으로 손 머리 하트를, 질문 있으면 카메라 화면에 손바닥을 갖다 대라고 하셨다. 어색한 36명의 학습자가 모여서 하라는 대로 잘 따라 하는 모양이었다.

컴퓨터가 아니라서 학습자 전원이 한 화면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중간중간에 궁금증이 있었지만 하고 싶은 질문을 다른 학습자들이 해서 해결이 되었다. 역시 질문이 많아야 배움이 많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 듯했다.

강의의 마지막 8차시는 발표수업이라고 했다. 그것도 온라인으로 진행한다고 안내를 받았다. 사다리 타기 프로그램으로 발표 순서를 정하고, 동영상이나 ppt도 보여주며 발표할 수도 있다고. 아직은 시작도 안 했으니 먼 일이긴 했다. 걱정도 있지만 덤벼보자고 혼자 파이팅을 외쳤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온라인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는데, 직접 온라인 수업을 경험하니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1시까지의 강의, 신문물을 접하는 기분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리허설까지 해서 단 세 번의 온라인 수업 경험이지만, 온라인 수업의 한계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깐 주의력이 흐트러지면 강의 내용을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강의하시는 분이 작은 화면에 나타나는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일일이 점검하며 수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온라인 강의의 속도는 오프라인보다 빠르게 느껴졌다. 화면에 띄운 내용이나 말을 미처 메모할 겨를 없이 다음으로 넘어가 버렸다. 36명의 낯선 학습자들 사이에서 모르는 채로 아쉬운 마음과 의문을 품고 수업의 흐름을 억지로 따라갈 수밖에.  

온라인 수업을 이미 경험한 학생들도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오프라인 학습에서는 나름 모범생의 태도를 자처하는 나도 온라인 수업에서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모양새를 취했고, 부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과정이 끝나기 전에 오프라인으로 집합 수업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온라인 수업을 하는 중에도 놓지 않고 있었다.
 
 
첫날 강의에서 강의를 진행하시는 분은 수업 말미에 신청서에 적었던 각자의 각오들을 모아 화면에 띄워주셨다. '배움엔 나이가 없다, 경력단절에서 사회 진출 통로, 평생학습 정책의 수혜자에서 공급자로, 인간의 전 생애에 대한 관심, 새로운 도전' 등등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만큼 이 과정은 모두에게 중요한 학습이었다. 처음의 이런 각오들이 온라인 강의의 불편으로 인해 희석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코로나 시대의 꿀팁도 전수해주셨다. 앱을 실행한 김에  멀리 떨어진 가족들을 초대해서 화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그렇게 꼭 해보시라고 거듭 권하기도 했다. 아직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화상 통화와는 다르게 여기저기 떨어진 많은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도 같았다.

위기가 기회가 된다는 말은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신문물도 접하고 여러 가족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일 수 있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이번 온라인 강의를 통해 영접하는 중이다.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이제는 낯설지도 않다. 뭐든 배워야 힘이 생긴다.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이든, 세상에 뛰어 들 힘이든, 어떤 힘이든지 키워야 한다. 그래야 도태되지 않고 자라나는 세대와 차이를 덜 느끼며 소통할 수 있을 테니. 그래야 세상을 품고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초중고 시절엔 그때만 지나면 다시는 책을 보지 않을 줄 알았다. 대학, 대학원을 거치며 다시는 머리 터지는 공부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끊임없이 문학을 탐구했다. 화법과 문법을, 다양한 문학작품을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했다.

직장을 그만둘 때만 해도 이제 이 짓을 그만해도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독서를 하고 있고 작가의 생각과 텍스트 너머를 읽으려 하고 정리도 한다. 이제 공부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배움을 만나고 있다. 잠깐 공부하면 그만인 세상은 지난 것 같다. 날마다 내일의 나를 꿈꾼다. 그렇게 삶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혼자서 스몰비어(소규모 맥줏집)를 운영하는 5년차 자영업자다. 4인석 테이블 5개로 이루어진 아늑한 공간에서 울산 명물인 라면 수프 쫀드기 튀김과 생맥주를 판매한다. 자영업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 5년 동안 맥줏집을 운영하면서 이제 꽤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습격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점점 거리에 사람이 줄더니, '불금'이라는 금요일 저녁에도 거리가 텅텅 비었다. 지난 2월 22일 울산에서 첫 확진자가 나오고 나서 한 테이블도 받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자 멍하니 뉴스만 틀어놓게 됐다. 평소 축구 보러 오시는 손님들이 많아서 매일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틀어놨었는데, 바이러스의 여파로 리그가 중지돼 재방송만 쓸쓸히 볼 뿐이었다.

계속 손 놓고 있다가는 가게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점포 방침을 세웠다. 모든 손님들에게 마스크를 끼고 들어오게 하고, 매장 내 소독도 구석구석 했다. 테이블 간 간격도 띄워서 밀집도를 낮췄다. 손님들이 조금이나마 안심하고 맥줏집에 올 수 있도록 방역 현황에 대한 자그마한 포스터도 만들어서 붙였다.

코로나19 감염이 한창이던 3~4월에 오시는 손님 중에는 일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공사현장 작업복을 입고 퇴근길에 들리신 분들, 방역업체에서 일하시는 분들, 출장 오신 분들과 이런저런 걱정들을 나눴었다. 이때, 맥주 추천을 해달라고 요청하시면 가장 달달한 청포도 과일 맥주를 권해드렸다. 잠깐이라도 기분 좋아지는 당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3~4월에 매출이 전년 동일 기간 대비 60% 떨어졌다. 가게 운영은 비상체제로 돌입했다. 가게 운영에는 월세와 전기요금을 비롯한 고정 지출이 꽤 들어간다. 매출 하락이 장기간 지속되면 생계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불안감에 소상공인 지원 사업을 찾기 시작했다.

'울산시 코로나19 피해 점포 소상공인 지원 사업'에 지원했지만, 매출 감소액이 기준치(최소 60% 이상)에 못 미치는 40%로 나와서 아깝게 지원자격이 안 됐다. 그렇다고 소상공인 코로나 대출을 받기에는 이자가 마음에 걸려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그렇게 월세를 내는 날이 찾아왔다. 건물주는 내가 내는 월세가 꼭 필요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드려봤지만, 날짜만 미뤄줄 수 있다는 답을 받았다. 우리 가게를 비롯한 맥줏집이 모여 있는 호프 거리에 착한 건물주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현수막이 걸렸을 때 씁쓸했다. 왜냐하면, 내가 호프 거리에서 대화를 나눠본 사장님 중에 착한 건물주를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5월 황금연휴가 다가오면서 잔뜩 위축돼 있던 거리가 조금씩 활력이 도는 게 느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면서 단골들도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한 커플은 귀한 마스크를 내게 줬다. "사장님, 문 닫으시면 안 돼요"라는 따뜻한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매주 찾아오시던 40대 부부 손님은 내가 민망하지 않게 팁을 주시려고 노력하시면서 현금으로 계산해 주셨다. 손님들과 서로 안부를 물으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안내 포스터를 무료로 만들어주시는 분도, 재고가 많이 남은 자영업자들의 가게를 무료로 홍보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회안전망이라는 개념에 '서로 돌봐주고 위로하는 행동'도 포함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많이 받았으니, 부지런히 일해서 나도 다른 사람의 사회안전망이 되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힘들 때일수록 주변 사람들의 작은 손길과 온정 어린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