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람천·임천 수질검사 결과 나왔지만... 시민들 "결과만 있고 대책 없어"


"원인은 나왔다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20일 남원시 산내면사무소에서 열린 '람천·임천 수질오염 정밀조사 용역 결과 설명회' 현장에서 주민들이 던진 질문이다. 3월 22일 물의 날을 앞두고 열린 이날 설명회에는 남원 산내와 함양 마천·휴천·유림면 주민 등 70~80여 명이 참석했지만, 기대했던 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번 설명회는 2025년 12월 완료된 수질 조사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조사에서는 축산폐수로 인한 오염 원인이 확인됐지만, 이를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제시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결과만 있고 대책은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전체 내용보기

진보 정치의 선구자로 기억되는 고 오재영 동지의 9주기 추모식이 21일 오전 11시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묘역에서 엄수됐다. 오재영 추모사업회(대표 김진석) 주관으로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전 대표, 신장식 조국혁신당 국회의원, 양경규 정의당 전 국회의원, 이호성 정의당 사무총장, 조동진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등 각계 인사와 유족, 동료·후배 활동가들 수십 명이 참석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

이날 추모식에 앞서 오재영 동지의 묘소는 말끔히 새 단장을 마쳤다. 수도권 추모연대가 매월 둘째 주 일요일마다 묘소를 정돈·청소해 온 가운데, 지난달에는 기존 잔디를 흑자갈로 교체하는 정비 작업이 완료됐다. 진행을 맡은 김용신 사회자는 "재영이를 닮은 색깔과 모양이 아닐까 싶다"며 "오신 분들 모두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추모식은 진보 정치를 위해 헌신하다 먼저 간 동지들을 기리는 묵념으로 시작됐다. 이어 참석자 전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며 고인의 삶을 함께 기억했다. 올해는 노래 공연 준비가 여의치 않아 지난해에 이어 공연이 없었으며, 사업회 측은 내년 10주기에는 반드시 공연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추모사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우리 모두가 오재영 동지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으며, 특히 나는 더욱 그렇다"고 운을 뗐다. 그는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지역 순회 강연을 하며 여관방에서 둘이 밤새 맥주 한 병씩 사다 마시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때 나눴던 이야기들이 가슴에 많이 남아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고인을 추모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것"이라며 "오재영 동지를 비롯해 많은 동지들이 삶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그 세상을 위해 만들었던 정당은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가를 이 자리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성찰해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두 번째 추모사는 정의당 이호성 사무총장이 대독 형식으로 전했다. 이 사무총장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당 상황을 볼 때마다 재영이한테 참 미안하다, 그 당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그런 마음이 늘 들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그러나 오재영 동지는 9주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그 마음을 받아 진보 정치를 지키고 진보 정당을 키우는 데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전체 내용보기
1619년 3월, 조총으로 무장한 포수와 보병 등 1만3000여 명(영화에선 1만8000명)의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북으로 행군 했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 조선 4개도에서 끌어모은 정예병으로, 조선 전체 군사가 채 10만 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하면 상당한 규모였다. 당대 최강국 명나라가 동북에서 일어난 누르하치의 후금을 상대로 치르는 전쟁에 명나라 편에서 참전한 것이다. 20여 년 전, 두 차례 왜란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잊지 못한 데다 지속적인 명의 참전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결과였다. 광해군은 형조판서 강홍립을 도원수, 양란에 종군한 바 있는 김경서를 부원수로 하여 군을 파견했다. 조선군 지휘권은 명이 아닌 조선 장수에게 있다는 조선의 조건이 관철됐다.

정유재란에도 참전했던 총대장 양호는 군을 넷으로 나누어 후금 수도인 허투알라(지금의 랴오닝성 푸순시 융링진)로 전진하는 전략을 세웠다. 조선군은 임진왜란서도 활약한 유정과 함께 동로군에 속했다. 임진왜란서는 뇌물을 받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봐주는 등 이순신 장군의 속을 태우긴 했으나 냉정히 보자면 그는 유능한 장수였다. 총대장 양호는 물론, 두송, 마림, 이여백 등 각 군 총병에 비하여도 나으면 낫지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서남쪽 사천성을 근거지로 하던 유정이 이끄는 병력 가운데 동북쪽 끝 만주까지 제때 도착해 함께하는 건 수천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사실상 동로군은 더 규모가 큰 조선군에게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설상가상, 보급조차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양호의 신속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군대는 충분한 정보도, 마땅한 퇴각로며 예비대도 없이 적 본진으로 시급히 내달려야 했다. 지극히 위태로웠다.

보급은 원활치 않고 북방에서 맞는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군대는 사기부터가 말이 아니었다. 유정의 군은 더운 지역에 익숙했고, 조선군은 왜 나라 밖에서 여진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의 전쟁에 파병한 군대

<사르후>는 이 시대 마땅히 기억돼야 하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2022년 나온 23분짜리 단편영화로, 통상적인 영화와 달리 국립진주박물관이 관내 전시와 유튜브 활용 목적으로 제작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교육용이나 홍보 목적 영상 제작을 하는 게 일반적이던 지역 박물관이 완결성 있는 영화 제작에 나선 건 당시는 물론 지금도 드문 일이다. 박물관이 직접 기획하고 전문 작가에게 각본을 맡기고 상당한 제작비를 들여 특수효과를 적극 활용한 점도 가벼운 시도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2022년 9월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사르후>는 역사 애호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조회수는 330만 회(3월 17일 기준), 국립진주박물관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11만을 돌파했다. 국영기관 중에선 흔치 않게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은 국립진주박물관은 <사르후> 제작 후기며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한 영상까지 추가로 게시했다. <사르후>를 포함한 국립진주박물관 제작 단편은 유튜브 채널뿐 아니라 박물관 홈페이지에서도 무료로 확인할 수 있다.

<사르후>는 앞서 적은 사르후 전투, 그러니까 명나라 대군이 후금의 수도를 향해 4로 병진하여 일대 결전을 펼치는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동로군에 속한 조선군을 비춘다. 주인공은 동로군 조선 좌영장 김응하(황성대 분)다. 첫 장면에서 그는 추위에 벌벌 떨며 주저앉아 쉬고 있는 조선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내심일까. 영화는 사내의 목소리로 '출병을 앞두고 조정에선 병사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씩을 돌렸다는데 면포로 한기를 막고 흰쌀로 주린 배를 채워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아니, 생각은 하였더라도 힘없고 가난하여 도저히 줄 수 있는 게 없었다'는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초라한 병사들의 모습과 씁쓸한 목소리는 이들과 조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 알게 한다.


전체 내용보기
고전 연극이 상반기 연극 무대를 장식한다. 고전은 단순히 오래된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과거에도 유효했고 현재도 유효하며 미래에도 유효할 가치를 담고 있어 의미 있다. 그 동시대성 덕분에 고전은 여전히 무대에 올라 연극계의 중심을 잡아준다.

올해 상반기 무대에 오르는 고전 연극들은 재창작에 가까운 각색 작업을 거쳤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까지 서울시극단 단장을 역임했던 연출가 고선웅이 이끄는 극공작소 마방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전 비극 두 편을 연달아 공연한다. 절제력을 잃어버린 권력욕 때문에 파멸로 귀결되는 비극 <맥베스>를 무협극으로 각색한 <칼로막베스>가 지난 15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이후 부산과 성남에서 지방 공연을 준비 중이다.

<칼로막베스>가 막을 내린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는 <리어왕>을 각색한 <리어왕외전>을 무대에 올린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극공작소 마방진은 두 작품에 이어 임선규의 1936년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각색한 <홍도>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외국 고전의 재창작뿐 아니라 우리 고전을 현대적으로 다듬는 작업도 병행하는 셈이다. 4월 개막하는 <홍도>에는 배우 박하선이 캐스팅되어 관심을 모은다.

국립극단도 고전의 재창작 대열에 합류한다. 지난 12일부터 관객과 만나기 시작한 연극 <삼매경>은 함세덕의 1939년 작 <동승>을 재창작한 연극으로, 1991년 <동승>에 출연한 배우 지춘성이 35년이 흐른 지금 다시 주인공을 맡는 버전으로 재창작되었다. 이어 5월에는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한국적 정서로 가다듬은 <반야 아재>를 무대에 올린다. 배우 조성하와 심은경의 출연 소식이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리어왕외전> <반야 아재>] 외국 고전의 재창작, 그리고 현지화

<칼로막베스>는 <맥베스>의 서사 구조를 충실히 따르지만, 분위기만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원작의 비극적이고 웅장한 분위기를 내려놓고, 검술 액션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통해 역동성을 더했다. '노승'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의상과 대사를 동양풍으로 바꾸는 등 영국 고전을 현지화하는 작업도 더해졌다.

극공작소 마방진은 <칼로막베스>에 이어 <리어왕외전>을 3월 20일부터 4월 12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선보인다. 세 딸에게 효심 경쟁을 요구하며 말년을 준비하던 리어왕이 아첨과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공연이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도 심오하기로 손꼽히지만, 배우 이순재가 2023년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무대를 이끄는 저력을 보여준 작품으로 국내 연극 팬들에게는 익숙하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 예술감독은 원작의 비극적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서사를 변형하고 오락성을 더했다. 리어왕이 탄식하는 장면이 다수 등장하는 원작과 달리, <리어왕외전>에서는 탄식 장면을 과감히 줄였다. 대신 조용필의 '허공'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리어왕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리어왕외전> 역시 대사와 배경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한국적 색채를 담아 각색되었다.


전체 내용보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극장가를 장악하며 21일 현재 누적 관객 1400만 명을 돌파했다.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선왕 단종의 동행을 그린 이 작품은,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유배와 몰락을 정면에서 다루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관객들은 스크린 속에서, 권력에서 밀려난 어린 왕과 그 곁을 지키려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청령포라는 폐쇄된 공간을 떠나면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졌을까? 단종을 되찾고자 했던 사람들, 그를 위해 칼날 앞에 선 왕자들과 왕족들의 운명은 어땠을까?

서울 은평구 일대에는 바로 그 '후일담'이 실물 상태로 남아 있다. 아파트 단지 사이의 특별한 신당, 산자락의 묘역, 그리고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웅장한 왕릉까지. 이 짧은 반경 안에, 단종을 지키려 했던 이들과 단종을 밀어낸 가문의 흔적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영화 속 청령포의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왔다면, 서울 북서쪽 은평은 그 비극이 실제로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야외 세트장이다.


나라가 제사 지내던 신당에 돌아온 왕자, 진관동 금성당

진관동 금성당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금성대군을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훨씬 남쪽, 전라남도 나주의 토착 신앙에서 시작된다.

조선시대 나주에는 고을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이 있었고, 이 지역에는 지역 수호신인 '금성대왕(金城大王)'을 모시는 신앙이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나주계 금성 신앙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오면서, 서울에는 구파발(현 진관동), 월계동, 망원동 세 곳에 금성당이 생겨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금성당의 특별한 위상이다. 이곳은 단순히 민간인들이 개인적인 복만을 빌던 평범한 굿당이 아니었다. 금성당은 나라에서 제물과 제관을 보내어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이 관영 도당에 놀라운 인연이 겹쳐지며 역사가 바뀐다. 나주의 옛 지명에서 유래한 신 '금성(金城)'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왕자 '금성(錦城)대군'의 이름이 연결된 것이다.

금성대군 이유의 봉호 '금성(錦城)'은 바로 이 전라도 나주의 옛 지명 금성(錦城)에서 따온 것이다. 즉, 왕자 금성대군의 작호 자체가 이미 나주 금성이라는 지명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우연한 동명이 아니라, 애초에 같은 지명에서 뿌리내린 이름이었던 셈이다.


금성대군 이유는 1426년(세종 8년)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째 아들이었다. 형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세조로 즉위하자, 그는 권력의 대세를 알면서도 거꾸로 갔다.

1437년(세종 19년) 세종은 그를 제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된 의안대군 방석의 봉사손으로 입양시켰다. 봉사손이란 후사가 없는 왕족의 제사를 잇기 위해 다른 집안에서 양자를 들이는 조선 왕실의 제도였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의례적 입양을 넘어, 그가 조선 왕실 초기 권력 투쟁의 비극적 희생자였던 숙부의 원혼을 달래는 상징적 존재가 됐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가 조카 단종을 향해 비타협적인 충의를 지키게 된 정신적 뿌리가 됐다고 평가된다.

1457년(세조 3년),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사사됐다. 당시 금성대군의 나이는 32세였다. 이 거사는 훗날 '정축지변'으로 불리는 대학살로 이어져, 순흥부는 역모의 땅이라 하여 행정구역 자체가 폐지되었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처형됐다.

세조는 금성대군을 역모의 주동자로 처형한 후, 조선의 관례에 따라 그 집안까지 연좌시켰다. 부인과 자식들은 노비로 전락했고, 공식 기록 속에서 금성대군은 오랫동안 '역적'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다른 기억이 형성됐다. 권력의 기록 속에서 그는 반역자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는 단종 편에 섰던 마지막 왕자, 불의에 맞서다 쓰러진 의로운 인물로 기억됐다.

전체 내용보기
1950년 크리스마스, 영국 런던.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한 구석에 세 명의 청년이 온 몸에 땀을 흘리며 거대한 무언가를 옮기고 있다. 거친 숨소리 속에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는 모양을 보니, 도둑질을 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불청객들이 훔쳐가려고 하는 것이 왕관이나 금은보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칠고 투박한 '돌덩이'였다.

운명의 돌

스쿤의 돌(Stone of Scone), '운명의 돌'이라 불리는 네모난 사암은 스코틀랜드 왕권을 상징한다. 9세기 최초의 스코틀랜드 통합 왕이었던 케네스 맥알핀은 대관식에 앉았던 돌을 왕국의 수도, 스쿤으로 가져갔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들은 머리에 관을 얹기 위해 이 돌 위에 앉아야 했다. 152kg 무게를 가진 돌은 단순한 성유물을 넘어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러나 1296년, 스쿤의 돌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망치'라 불리던 영국 왕 에드워드 1세가 이 돌을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대관식용 의자를 새로 만들면서, 의자 바로 아래에 이 돌을 끼워 넣도록 명령했다.

그날 이후, 영국 왕들은 대관식 때마다 스쿤의 돌을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았다. "너희는 영원히 우리 밑에 있다"는 노골적이고 굴욕적인 메시지였다. 14세기 로버트 브루스가 배녹번 전투에서 영국에게 승리하며 독립을 쟁취했을 때도 돌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밤, 이안 해밀턴, 케이 메티슨, 개빈 버넌, 앨런 스튜어트, 글래스고 대학생 네 명은 654년 동안 영국 왕들에게 치욕을 당하며 의자 밑에서 잠자고 있던 자신들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발칙한 계획을 실행한다.


2008년 개봉한 <운명의 돌>은 1950년 대영제국을 뒤 흔들었던 실제 사건을 유쾌하지만 묵직하게 그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스쿤의 돌을 스코틀랜드로 가져간 이안 해밀턴과 친구들. 돌이 사라진 뒤, 영국은 발칵 뒤집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700년 묵은 한을 풀어낸다.

그런데 영화가 끝을 향해 다가갈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곧 스코틀랜드에서 독립 운동이 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안 해밀턴은 스스로 범인임을 밝히며 돌의 위치까지 알려 준다.

영국 경찰 또한 이들의 행위를 '대학생들의 치기어린 장난'으로 격하하며 사건을 종결한다. 돌은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돌아갔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마지막 크레디트를 본 뒤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왜 이안 해밀턴은 자수한 걸까?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을 원한 게 아니었나? 돌이 다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돌아갔는데 이들은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3.1운동의 혁명 정신을 헌법에 새긴 한국인의 시선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독립 아니면 죽음'이라는 결연한 정서를 지닌 우리에게, 돌을 되찾는 데 몰두하면서 체제는 유지하려는 그들의 태도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다.

그때, 영화 속에 봤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거사를 모의하던 스코틀랜드 대학생들의 손에 들려있던 맥주가 '스카치 에일(Scotch ale)'이 아니라 '잉글리시 비터(English bitter)'였던 그 장면이.

같지만 다른 나라

'함무라비 법전 제 109조. 만일 어떤 여인(주모)의 집에 반역자들이 모였는데, 그녀가 그들을 체포하여 궁궐로 끌고 가지 않는다면, 그 여인은 사형에 처한다.'

전체 내용보기
반공의 본질을 증명하는 사건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있었다. 반공이 용공으로 매도돼 전직 경찰청 수사국장이 총살형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한국인들을 억압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순전히 허구였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북한군이 전면 공격을 개시한 1950년 6월 25일, 전직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인 최능진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그는 1948년 5·10 총선 때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막고자 서울 동대문갑구 출마를 시도했다가 극우세력의 훼방으로 후보자 등록에 실패한 독립운동가다.

이 일은 '이승만 저격수'를 저지하고 무투표 당선에 성공한 이승만이 7월 20일의 대통령 선거 승리 뒤에 정치 보복을 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0월 1일에 이승만 정권은 정부전복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했다. 이 때문에 항소심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상고심 재판을 받던 중에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은 서대문형무소를 열어 수감자들을 풀어줬다. 하지만 그에게는 인민군 또한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최능진의 대담한 행보


1899년에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그는 1917년부터 흥사단·청년혈성단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7년의 유명한 공안사건인 수양동우회 사건에 엮어 옥살이를 했다. 그는 해방 직후에는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의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소련군을 피해 9월에 월남했다.

최능진이 모셨던 조만식은 소련군 및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했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군이 옥문을 열어준 일은 그를 애매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벌인 일이 반전평화운동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8권 최능진 편은 "최능진은 1950. 7.경 북한군 점령하에 있던 서울에서 민족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즉각 정전, 평화호소대회'를 추진"했다고 기술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를 다루는 글에 나타나는 '민족진영'은 세계 노동자의 연대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에 맞서 한민족 부르주아의 이익을 옹호하는 세력을 듣기 좋게 표현하는 용어다. 1994년 1월 23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극장> 최능진 편은 그가 접촉한 '민족진영'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에는 인도교 폭파로 서울을 떠나지 못한 정치인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최능진은 이들과 접촉, 민족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즉시 정전, 평화통일운동'이었습니다."

전체 내용보기
[여성과 인권] "스토킹은 일상과 가정을 파괴하는 악질적 범죄"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이 부천원미경찰서를 방문했습니다. 남양주 스토킹 살인 사건 이후 진행되고 있는 관계성 범죄 전수점검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한 보도에 따르면 유 직무대행은 현장에서 이런 발언들을 했습니다.

"관계성 범죄로 인한 추가적인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익숙합니다. 교제살인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죠. "관계부처와 협의해 신속히 제도 및 입법 보완을 추진해 나가겠다"는 발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으로는 피해자 보호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피해자보호명령제 도입의 필요성도 그래서 여러 번 대두됐습니다. 피해자가 경찰 또는 검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법원에 접근금지 등 보호명령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제도는, 2021년 스토킹처벌법 제정 당시부터 나왔던 주제입니다. 2022년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정부가 피해자보호명령제를 포함한 개정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도입이 되지 않고 있는 이유,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 측은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과 심리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 등을 내세우며 난색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23년 법안소위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출석한 법원행정처 차장은 "스토킹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피해자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바로 보호명령을 발동해도 되는지에 대한 우려가 판사한테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심리에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말은 스토킹 범죄 자체에 대한 법원의 이해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스토킹 사건 자체가 결별 과정에서 생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한 집'에 살지 않아도 피해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범죄입니다. 그 위험성에 대한 판단을 경찰이나 검찰뿐 아니라 법원도 함께 하자는 것이 피해자보호명령제의 골자입니다. 국민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구축하자는 것이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이 이 날 했던 말, 제발 법원이 곱씹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헤어지지 못하고 스토킹을 당하는 상황은 언제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평온한 일상과 감정을 파괴하는 악질적 범죄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