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어머니는 거지입니다'... 일본 왕족의 예상 밖 한국 생활
영친왕(1897~1970)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며느리인 이방자를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두 개의 계기가 있었다. 1916년과 1963년의 일이 그 계기가 됐다.

대한제국 멸망 6년 뒤인 1916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여왕(梨本宮方子女王) 또는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로 불리던 그가 이왕세자(李王世子)인 이은과 약혼한 사실이 발표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해 8월 3일 자 기사에 "리왕세자비(李王世子妃)난 리본궁 방자녀왕으로 결뎡"됐다고 보도했다. 이왕세자비(세자빈)는 그렇게 결정해졌다는 이 발표는 그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린 첫 번째 사건이다.

남편이 될 이은은 고종이 황제이고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영친왕(영왕)으로 불렸다. 1907년에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물러나고 순종이 황제가 된 뒤에는 순종의 이복동생인 그가 황태자로 격상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격상이라 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5일, 그는 인질이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한국을 떠난 그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아버지가 이태왕(이태왕)으로 격하되고 이복형이 이왕으로 내려감에 따라 이왕세자라는 지위를 갖게 됐다.

원치 않은 정략결혼


이방자는 1901년 11월 4일 당시 일왕인 무쓰히토(연호 메이지)의 사촌형제의 손녀로 태어났다. 이런 신분을 갖고 태어난 그는 자신이 대한제국에서 끌려온 인질과 약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약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일이 다 정해진 뒤였다. 그에게 소식을 알려준 것은 부모도 아니고 지인들도 아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스마트폰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그의 구술을 기초로 작성된 회고록인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집은 매년 여름이면 오이소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을 나곤 했다. 오이소는 도쿄 서남쪽에 있는 해안 도시로 유명한 별장지대였다.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무심히 신문을 집어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사진이었다. 이 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이방자 자신에게도 통지되지 않은 이 정략결혼은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선전됐다. 자신이 일반적인 외국 왕자도 아니고 비운의 외국 인질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고 충격을 받은 딸을 보면서 그의 어머니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다독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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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온 힘을 다해 '자유'를 외치는 남자.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은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명장면이다. 주인공의 이름도, 무엇 때문에 죽는지도 희미하지만, 장렬히 산화하는 멜 깁슨(윌리엄 월리스 역)의 표정과 목소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종종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다른 나라의 역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깊이 몰입하기 힘든 순간이 오곤 한다. 돌이켜 보면, <브레이브 하트>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대영제국으로 묶여 마치 한 나라처럼 보이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모르면서 참혹하게 죽는 주인공에 가슴 아파했다.

넷플릭스 영화 <아웃로 킹(Outlaw King)>에 눈길이 간 것도 평소 품고 있던 스코틀랜드 역사에 대한 작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짧은 소개에는 14세기 스코틀랜드 왕이 된 '로버트 브루스'의 영웅적 서사를 다루고 있다고 나와 있었다.

생각해 보니, <브레이브 하트>도 스코틀랜드의 독립 영웅, 윌리엄 월리스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 속에서 로버트 브루스는 영국 측에 서 있다가, 윌리엄의 죽음 이후 각성하는 귀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의 영도 아래 베녹번에서 영국군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아웃로 킹>은 두 인물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로버트 브루스 중심으로 바라본 스코틀랜드 독립 이야기는 어떤 색깔일까? 혹여 두 영웅이 맥주라도 함께 마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어느새 나의 손은 홀린 듯 '지금 재생' 위를 향하고 있었다.

혼란의 스코틀랜드 왕국

1296년,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땅을 침공했다. 영국이 내세운 명분은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 스코틀랜드는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0년 전 안정적인 치세를 이어가던 알렉산더 3세가 사고로 죽은 후, 왕권은 줄곧 공백 상태였다.

권력의 부재 속에 스코틀랜드 귀족과 주교들은 '스코틀랜드 수호자(Guardians of Scotland)'를 조직하고, 차기 국왕 선출에 나섰다. 공정한 왕의 선출을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영국의 왕, 에드워드 1세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번 중재를 스코틀랜드를 자신의 발밑에 둘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결국 무능한 존 베일리올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운 에드워드 1세는 사사건건 정치에 개입하며 세금과 군역을 강요했다.

수탈에 분개한 스코틀랜드 귀족은 무력한 존 베일리올의 실권을 박탈하고 12인의 수호자를 결성했다. 나아가 영국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런 스코틀랜드의 움직임은 영국에겐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영국 치하에 들어간 스코틀랜드

1296년 4월 27일, 항구 도시 베릭에서 대학살을 벌인 영국군은 북진을 개시했다. 스코틀랜드 군은 던바 성 외곽에 최후의 저항선을 구축하고 결전을 준비했으나 결과는 대참패였다. 수적으로는 앞섰을지도 모르나 전략과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웃로 킹>은 바로 이 '던바 전투'에서 시작된다. 존 베일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 앞에서 영국의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항복 선언을 넘어선다. '스코틀랜드의 수호자'라는 지배 체제의 완전한 이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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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1897~1970)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며느리인 이방자를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두 개의 계기가 있었다. 1916년과 1963년의 일이 그 계기가 됐다.

대한제국 멸망 6년 뒤인 1916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여왕(梨本宮方子女王) 또는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로 불리던 그가 이왕세자(李王世子)인 이은과 약혼한 사실이 발표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해 8월 3일 자 기사에 "리왕세자비(李王世子妃)난 리본궁 방자녀왕으로 결뎡"됐다고 보도했다. 이왕세자비(세자빈)는 그렇게 결정해졌다는 이 발표는 그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린 첫 번째 사건이다.

남편이 될 이은은 고종이 황제이고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영친왕(영왕)으로 불렸다. 1907년에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물러나고 순종이 황제가 된 뒤에는 순종의 이복동생인 그가 황태자로 격상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격상이라 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5일, 그는 인질이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한국을 떠난 그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아버지가 이태왕(이태왕)으로 격하되고 이복형이 이왕으로 내려감에 따라 이왕세자라는 지위를 갖게 됐다.

원치 않은 정략결혼


이방자는 1901년 11월 4일 당시 일왕인 무쓰히토(연호 메이지)의 사촌형제의 손녀로 태어났다. 이런 신분을 갖고 태어난 그는 자신이 대한제국에서 끌려온 인질과 약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약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일이 다 정해진 뒤였다. 그에게 소식을 알려준 것은 부모도 아니고 지인들도 아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스마트폰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그의 구술을 기초로 작성된 회고록인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집은 매년 여름이면 오이소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을 나곤 했다. 오이소는 도쿄 서남쪽에 있는 해안 도시로 유명한 별장지대였다.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무심히 신문을 집어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사진이었다. 이 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이방자 자신에게도 통지되지 않은 이 정략결혼은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선전됐다. 자신이 일반적인 외국 왕자도 아니고 비운의 외국 인질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고 충격을 받은 딸을 보면서 그의 어머니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다독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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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연휴 마지막 날 오전, 요즘 장안의 화제인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관람했다. 조조할인이 되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객석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영화표를 끊으며 은근히 내가 혹시 천만번째 관객일 수도 있겠다는, 자못 엉뚱하고도 황당한 기대를 품기도 했다.

지금껏 장르와 상관없이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라면 빠짐없이 관람했다. 역사 교사로서 의무인 양 여겼고, 사실과 허구를 가려내는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영화의 첫 시작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내용'이라는 한 줄짜리 문장이었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비극적 최후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지금껏 상업 영화뿐만 아니라 TV 대하드라마와 소설 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내용 전개상 선악의 대비도 명확할뿐더러 악역을 맡게 될 역사의 실존 인물도 사실상 정해져 있다. 한명회 아니면 신숙주, 둘 중 하나다.

묘미는 영화 속 가공인물의 역할이다. 기실 이들이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관객들에게 마치 실존 인물처럼 여겨지도록 해야 하고, 최소한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역할이다. 자고로 주연 같은 조연이 있어야 잘 만든 영화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단역을 제외하곤 가공인물이 거의 없다. 엄흥도(유해진 분)의 아들(김민 분)과 그가 촌장으로 있는 마을 주민들 외엔 드물다. 눈에 띄는 이가 있다면, 유배지까지 따라와 노산군 이홍위(박지훈 분)를 모시다 함께 생을 마감하는 궁녀 매화(전미도 분) 정도다.

단종과 엄흥도, 한명회(유지태 분)의 비중이 너무 커서일까. 다른 영화에서라면 너끈히 주연으로 삼았을 금성대군(이준혁 분)도 카메오로 몇 장면에서만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어 가공인물처럼 느껴진다. 사실로서의 역사에 최대한 충실하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영화 속 왕방연과 실제의 왕방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영화 초반 한명회가 동강 건너편 절벽 위에서 청령포를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불현듯 떠올랐던 시조다. 조선 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표현한 연군가(戀君歌)로, 학창 시절 매번 시험에 출제되던 작품이다. 단종의 사사를 집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쓴 시조로 알려져 있다.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단종과 엄흥도, 한명회 외에 두 사람의 실존 인물이 조연으로 등장하리라 봤다. 위 시조를 남긴 왕방연, 그리고 관풍헌에서 단종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았을 당시 영월군수. 주제를 더욱 부각할 수 있는 인물들이어서다.

왕명을 집행해야 하는 관리로서의 왕방연의 도덕적 고뇌는 맥락상 엄흥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데다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한다. 영화 말미에 왕방연과 엄흥도의 '케미'를 기대했는데, 헛물만 켠 셈이 됐다. 영화 속에선 자결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감독의 상상력으로 윤색했다.

왕방연은 단역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딱 한 번 등장한다. 그마저 사약을 앞에 두고 어명을 받으라는 대사가 전부다. 그의 시조 속에 절절히 담긴 단종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다. 일부 기록에서 그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땅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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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6.3 지방선거를 위한 국민의힘 광역단체장 공천 접수 마지막 날까지 공천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앞서 오 시장은 지난 7일 "당 노선 정상화라는 선결 과제를 풀지 않는 이상, 후보 접수와 경선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며 '당 정상화'를 촉구한 바 있다.

국민의힘 내 '당권파'로 분류되는 나경원 의원과 신동욱 수석최고위원은 공개적으로 불출마 의사를 표했고, 안철수 의원도 공천 접수를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부산 등 주요 지역에서도 유력한 후보를 찾지 못한 국민의힘은 당분간 계속 '구인난'에 허덕일 전망이다.

오세훈·나경원·신동욱·안철수... 줄줄이 공천 미신청


오세훈 서울시장은 6.3 지방선거를 위해 열린 광역단체장 공천 접수 시한인 8일 오후 6시까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오 시장은 이날 언론 공지를 통해 "지난 7일, '당 노선 정상화라는 선결 과제를 풀어낼 때, 패배의 길을 승리의 길로 바꿀 수 있다'고 호소한 바 있다"면서 "지금도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당 지도부와 의원들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알렸다.

설명대로 오 시장은 하루 전인 지난 7일 페이스북에 '마지막 호소'라는 제목의 글에서 "당 노선 정상화라는 선결 과제를 풀지 않는 이상, 후보 접수와 경선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했다. 취임 후 연일 강경 행보를 이어가는 장동혁 당대표를 겨냥하며 노선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그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이겨놓고 전장에 임해야 한다. 적어도 이기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고 전장에 임해야 한다"면서 장 대표를 향해 "필패의 조건을 갖춰 놓고 병사를 전장으로 내모는 리더는 자격이 없다"라고 썼다.

또 "수도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수도권을 내주면 보수는 또다시 암흑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면서도 "그런데 지금 우리 당은 수도권 선거를 포기했다"고 직격했다. 그러면서 "현 상태에서의 경선은 많은 지역에서 노선 갈등으로 이어져 본선 경쟁력의 처참한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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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의 반복된 경고에도 인간은 여전히 온실가스를 대기로 배출한다.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 약 1.4℃ 상승했고, 극한 기상은 더 잦아졌다. 수많은 사람이 예방 가능한 재난으로 목숨을 잃었고, 수조 달러에 이르는 경제적 피해가 뒤따랐다.

여기에 삼림 벌채와 대규모 축산업 같은 인간 활동은 생물다양성을 빠르게 무너뜨린다. 수많은 종이 멸종 위기로 내몰렸고, 자연의 균형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야생동물은 본능적인 행동을 통해 숲을 재생하고 탄소를 저장하며 생태계를 회복하는 데 기여한다. 인간이 만든 위기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그 피해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들의 존재가 사라지면 지구의 미래도 함께 흔들리게 된다. 지난 3월 3일은 세계 야생동물의 날이었다. 기후 대응의 최전선에서 조용히 활약하는 동물들의 숨은 역할을 조명했다.

탄소를 저장하는 코끼리와 호랑이


대형 야생동물은 단순히 생태계의 일부가 아니라 지구의 탄소 순환을 조절하는 숨은 기후 조절자 역할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코끼리와 호랑이다. 코끼리는 오래전부터 생태계 엔지니어, 숲의 정원사, 씨앗 확산자로 불렸다. 최근에는 여기에 새로운 별명이 하나 더 붙었다. 바로 '기후 영웅(climate hero)'이다. 특히 중앙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아프리카 숲코끼리(African forest elephant)는 숲의 탄소 저장 능력을 높여 기후변화 완화에 기여하는 동물로 주목받는다.

코끼리는 숲의 구조 자체를 변화해 탄소 흡수 능력을 높인다. 2019년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코끼리가 숲을 이동하며 작은 나무를 넘어뜨리거나 식물을 먹어 나무 밀도를 낮추면 빛·물·공간을 둘러싼 경쟁 구조가 바뀐다. 이 과정에서 목질 밀도가 높은 큰 나무들이 더 잘 자라며 숲의 장기적인 탄소 저장량이 증가한다.[1]

2023년 PNAS에 발표된 또 다른 연구도 코끼리가 숲의 탄소 저장 능력을 강화하는데, 코끼리가 사라지면 중앙아프리카 열대우림의 지상 탄소 저장량이 약 6~9%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2] 코끼리의 이러한 영향은 숲 생태계 전반에 걸친 생지화학(Biogeochemistry) 순환과 연결된다. 대형 초식동물의 활동은 토양과 식생 구조를 바꾸고, 장기적으로 숲의 생물량과 탄소 저장 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3]

코끼리가 하루에 먹는 양은 약 180kg을 상회한다. 먹이를 찾으며 숲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나무를 밟고 넘어뜨리거나 잎과 가지를 뜯어 먹으면서, 특히 탄소 밀도가 낮은 작은 나무들이 줄어든다. 그 결과 성장 속도는 느리지만 목재 밀도가 높은 큰 나무들이 물·빛·공간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숲에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흡수·저장되는 외부효과를 일으킨 셈이다.[4]

코끼리는 숲의 씨앗 확산자 역할도 한다. 코끼리가 과일을 먹은 뒤 배설하는 과정에서 씨앗이 멀리 퍼지고 일부 씨앗은 아예 (코끼리 등의) 소화 과정을 거쳐야 발아가 가능하도록 진화했다. 이런 과정은 마찬가지로 탄소 저장 능력이 높은 큰 나무들의 확산을 돕는다.[5] 세계자연기금(WWF)은 이러한 생태 활동 덕분에 숲코끼리 한 마리가 매년 축구장 약 140개에 해당하는 면적(약 100헥타르) 숲의 탄소 순흡수 능력을 높이며, 그 숲의 탄소 순흡수량은 자동차 2047대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제거하는 효과와 맞먹는 것으로 추정했다.[6]

코끼리는 토양 탄소 순환에 영향을 미친다. 배설물은 토양에 유기물을 공급해 탄소가 토양에 축적되는 과정을 촉진한다. 또한 코끼리가 먹고 남긴 식물 잔해는 분해 속도가 느려 토양에 더 많은 탄소가 남도록 한다.[7]

그런데 '기후 영웅' 코끼리가 심각한 위기에 놓였다. 숲코끼리는 상아 밀렵과 서식지 파괴로 개체 수가 급격히 줄었다. 지난 31년 사이에 개체 수가 86% 이상 감소했다. 현재는 역사적 서식 범위의 약 4분의 1에서만 발견된다.[8] 코끼리를 보호하는 일은 단순히 한 종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숲의 탄소 저장 능력과 생물다양성 그리고 기후 안정성을 지키는 일과도 직결된다.


호랑이 역시 숲의 탄소 저장 능력을 높이는 중요한 포식자다. 지난해 학술지 와일리(Wile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토착 호랑이가 서식하는 숲은 그렇지 않은 숲에 비해 헥타르당 최대 12% 더 많은 탄소를 저장한다. 호랑이는 사슴과 멧돼지 같은 동물을 사냥하는데, 만약 이 동물들이 과도하게 늘어나면 어린나무와 식물을 지나치게 먹어 숲의 성장을 방해한다. 호랑이가 포식자로서 개체 수를 조절하면 식생이 회복되고 숲의 탄소 흡수 능력이 함께 높아진다.[9]

코끼리와 호랑이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숲의 균형을 유지하며 자연이 탄소를 저장하는 능력을 강화하는 숨은 기후 조절자 역할을 한다.

숲을 살리는 '굴착 동물'… 베통과 에키드나, 그리고 웜뱃의 숨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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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국민이요."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학교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19명 아이들 가운데 5명이 이렇게 말했다.

"교장선생님이요."

나머지 아이들은 쉽게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올해 5학년인 우리 반 아이들과 매일 헌법 한 조항씩 읽으며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했다. 헌법은 총 130조이니 1년 동안 천천히 우리 사회의 약속을 하나씩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5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의 법과 인권에 관한 단원과 연관이 있다. 사실 나 역시 헌법 전체를 차분히 읽어본 적이 거의 없기에 이번 공부는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의 학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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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수요일, 그날은 평범한 오후였지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골목은 평소와 달랐다. 갑작스러운 '차량 통제'라는 팻말이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뒤이어 큰길에서 갈라진 좁은 길목으로 소방대원과 등에 '의용소방대'라 쓰인 주황색 조끼를 입은 분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그분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도로변에 세워진 소방차들을 보자 큰일이 났구나 싶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불이 났나요?"

다급하게 묻는 내게 의용소방대원 중 한 분이 친절하게 답했다.

"불이 난 게 아니라 훈련 중이에요."

긴급 출동을 방해하는 차량에 대해 강제 처분하는 '실전 훈련'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만히 보니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왜 하필 이 좁은 골목에서 훈련을 하는 걸까? 궁금해서 물었다.

"이곳이 바로 '소방영웅길'이거든요."

의용소방대원의 답변에 내가 걷는 이 길이 아주 특별한 장소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모르고 지나쳤다. 이곳이 순직 소방관들을 기리기 위해 '소방영웅길' 명예도로로 지정됐다는 사실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파트 앞 큰길에서 좁은 길로 내려오면 크고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길가의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운동장에 '긴급 출동 방해 차량 강제 처분 실전 훈련'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고은초등학교를 몇 번이나 다녀갈 일이 있었는데도 '소방영웅길'을 몰랐다는 게 미안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서 언덕길 초입에 세워진 안내판에 적힌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2001년 홍제동 화재 참사

사건은 2001년 3월 4일 새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제동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대원들은 "안에 아들이 있다"는 다급한 주민의 외침 소리에 망설임 없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2층 창문으로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순간, 건물이 무너지면서 화재의 잔해 속으로 아홉 분의 소방관이 매몰되었다. 그중 여섯 분은 끝내 차가운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대한민국 소방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이름, '홍제동 화재 참사'로 기록되었다.

순직한 여섯 분의 희생으로 우리나라 소방대원들의 열악한 근무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장에 투입된 소방대원들이 입고 있던 옷이 방수복에서 방화복으로 바뀌고, 장비가 대폭 보강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그 위험한 터전에 제대로 된 장비 없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행히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 처우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명예 길이 조성된 것은 그로부터 오랜 시일이 지난 2024년 3월이었다. 3월 4일,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이 장소에 내가 서 있는 것도 왠지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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