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제주 포도호텔 ‘벚꽃 막걸리’ 품은 봄 시즌 한정 패키지 출시
제주--(뉴스와이어)--SK핀크스가 운영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자연주의 철학이 담긴 제주 포도호텔이 ‘봄 시즌 한정 브리즈(Spring Breeze)’ 패키지를 새롭게 출시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지붕의 모습이 한 송이의 포도송이를 닮은 포도호텔은 갤러리를 연...
도시가 변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다. 외부의 자본과 행정이 계획을 세워 공간을 물리적으로 바꾸는 방식,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을 다시 읽고, 말하고, 엮어내는 방식이다. 진정한 변화는 늘 후자에서 시작된다.

지난 9일 저녁, 요즘 여행지로 뜨고 있는 강원도 동해시 묵호의 '트루리 공방'에서 포틀럭 파티가 열렸다. 포틀럭 파티는 저마다 준비한 음식과 선물로 파티를 여는 소모임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호를 살아내고 기록해 온 작가, 활동가, 기획자 2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상 위에는 각자 준비해 온 음식 뿐 아니라 묵호를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놓여 있었다. 한 지역의 미래는 때때로 회의실보다 식탁에서, 행정 문서보다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에서 먼저 태어난다.

이날 대화의 화두는 '지속 가능한 지역의 모습'이었다. 오래된 건물이 남은 거리에 새로운 숨결이 들어선다면, 인위적인 관광지가 아닌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골목의 힘으로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묵호라는 브랜드가 동해시 전체의 유기적 생활권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단순한 홍보 차원을 넘어, 방문자의 체류 시간을 어떻게 늘리고 다시 찾게 만드는 '관계의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필자가 특히 공감한 대목은 '행정 중심'이 아닌 '시민 중심' 관광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시민이 스스로 동네의 얼굴이자 안내자가 되는 방식이다. 지역 매니저들이 자기 생활권의 이야기를 엮어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동해는 묵호라는 점 하나에 기대는 도시가 아니라 골목과 해변이 살아 움직이는 입체적인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관광객을 끌어오는 '기술'이 아니라, 머물게 하는 '관계의 윤리'다.

반짝이는 유행은 사람을 모으지만 오래 붙잡지는 못한다. 풍경은 기억에 남지만, 발걸음을 되돌리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나를 기억해 주는 얼굴과 나만의 자리가 있다는 감각, 그것이 생활관광의 본질이다. 관광정책의 언어로는 '체류형 관광'이고, 삶의 언어로는 '관계 인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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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너도나도 주식이다. 사무실 김 부장도, 과일가게 사장님도, 취업을 앞둔 취준생도 주식을 향한 열기가 뜨겁다. 대통령마저 주식을 권장하는 시대, 코스피는 5천을 넘어 어느새 6천 시대를 열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맞나?' 싶다. K 주식시장이 전 세계에서 제일 핫하단다.

주식 투자자 1500만 명 시대다. 경제활동 인구 둘 중 하나는 주주인 셈이다. 체감온도는 다르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만 빼고 주식 안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주식을 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고, 꼬박꼬박 나오는 급여로 가정을 꾸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식은 말 그대로 회사의 지분을 사는 거다. 알지도 못하는 회사를 살 수 없으니 공부는 필수다.

일을 하는 것도 벅찬데 시사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빠릿빠릿하게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기사가 많았다. 주식을 하면 파산한다는 둥, 주식은 위험하다는 둥, 주식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는 둥. 주식하면 '위험 자산'이 먼저 떠올랐다.

주식투자, 저도 시작해 보았습니다

40이 넘도록 코스피 200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주식에 관심이 없던 내가 지난주부터 주식을 시작했다.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급여가 끊길 날이 머지 않았고 인간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난다고 하니 불안이 증폭했다. 퇴사 이후의 삶부터 무덤에 갈 때까지 재정적으로 붕 뜬 미래가 명확히 그려졌다.

"네가 주식을 하다니 이제 진짜 시장을 떠날 때가 됐네."
"트럼프가 쏘는 미사일보다 네가 주식 시작하는 게 더 무섭다."

친구들 반응이 얄궂다. 나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에 응원은 못해줄망정 조롱 섞인 우려가 쏟아진다. 난 안전하게 적립식으로 오래 투자해서 잃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도움 안 되는 놈들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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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경기 부천시 고강본동의 한 공터에 봄꽃이 심어졌다. 그동안 쓰레기가 쌓여 있던 공간이 주민들과 마을활동가들의 손길을 거쳐 작은 꽃밭으로 변했다. 도심 속 유휴공간에 꽃과 식물을 심는 '게릴라 가드닝' 활동이다.

게릴라 가드닝은 버려진 공터나 쓰레기가 쌓인 화단 등 활용되지 않는 공간을 주민들이 직접 정비하고 꽃과 식물을 심어 녹지 공간으로 바꾸는 시민 참여형 도시녹화 활동이다.

이번 활동은 마을공동체 네트워크 '우리마을주민기획단' 공익활동의 하나로 진행됐다. 주민들은 방치돼 있던 공간의 쓰레기를 치우고 꽃과 식물을 심으며 주변 환경을 정비했다. 특히 고강본동 현대아파트 주변 화단은 평소 쓰레기가 쌓이던 곳이었지만 이날 활동을 통해 봄꽃이 피어나는 작은 정원으로 변했다.

부천시는 지난 2013년 '부천시 게릴라가드너' 활동을 시작으로 시민과 마을활동가, 지역 단체 등이 참여하는 도시녹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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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열여덟 살의 봄에 미술을 시작했다. 문예창작과 순수미술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내게 친구 하나가 물었다. "같이 미술 해볼래?"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당시 내가 하던 미술은 흔히 말하는 입시미술이었다. 이젤 위에 도화지를 올려두고 석고상을 연필로 그려 넣는 작업이었다. 아그립파, 비너스, 줄리앙부터 시작해 아리아스, 시저, 카라칼라, 호머까지. 이름도 낯선 석고상들을 하루 종일 바라보며 형태와 인체의 구조를 익혔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2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 방학이 되면 미술학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학원에 도착하여 아침을 해결한 후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점심과 저녁도 그곳에서 해결했다. 종일 연필을 쥐고 있다 보면 손끝은 흑연 가루로 새까매졌다. 연필심이 닳는 속도만큼 시간도 함께 지나갔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석고상을 그리면 결국 자기 자신을 닮게 그린다고. 신기하게도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깡마른 여고생이었는데, 내 도화지 위의 석고상 역시 어딘가 마른 모습이었다. 반대로 통통했던 친구의 그림 속 석고상은 묘하게 통통했다. 우습기도 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지겹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선생님은 우리가 지루해할 때쯤이면 가끔 수채화 수업을 해주었다. 연필 대신 붓과 물감이 등장하는 날이면 강의실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졌다. 덕분에 백일장에서 상을 받거나 사생대회에서 수채화를 그려 수상하기도 했다.

그 시절 나에게는 작은 로망이 하나 있었다. 화구통이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고 다녀보고 싶은 그 둥근 통 말이다. 사실 그 안에 특별한 도구가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잘 깎은 4B 연필 몇 자루와 지우개 몇 개, 칼 하나, 수채화 붓과 물감이 전부였다.

굳이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시골의 작은 미술학원이었기에 화구통을 학원에 두고 가도 누가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들고 다녔다. 어쩌면 그것은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갔다. 산업디자인과였다. 그때부터 그림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무와 바위 혹은 석고상으로 채워지던 도화지 위에는 자동차와 휴대전화 아이디어 스케치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4B 연필은 마카로 바뀌었고, 물감은 파스텔과 색연필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회로 나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하게 되면서 손으로 그림을 그릴 일은 거의 사라진 것이다.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이며 작업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손으로 느끼던 스케치북의 요철, 겹겹이 쌓아 올려 만들어내던 색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을 몇 번이고 찢어 다시 그리던 열정과 스트레스. 그런 것들은 컴퓨터 속 포토샵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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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있는 사람에게 새해는 1월이 아니라 3월이다. 3월부터 지난해와 다른 학년, 새로운 아이들 그리고 담당 업무가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 시대에 수업 방향은

겨울방학 동안 새 학기에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특히 하루하루가 다르게 인공 지능이 현실로 깊숙이 들어와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인공 지능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잡다한 지식을 애 터지게 가르쳐야 할까? 또한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굳이 머릿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내 수업에 의구심과 회의가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늘 현실과 타협하면서 외면해 왔다. 지난 겨울방학 동안도 딱히 해결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었다. 그러고도 한 주일이 흘렀다.

지난 주말,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2월 19일)에 있었던 일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설 연휴가 끝난 뒤라, 깔끔하고 시원한 냉면을 먹고 싶었다. 내 입맛에 맞는 냉면 집을 시간을 들여 찾아갔다. 그런데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19일)까지 휴업한다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어! 분명히 영업 중이라고 했는데. 설 연휴 다음 날이라 헛걸음하지 않기 위해 가기 전에 확인도 했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냉면 집을 확인하니 영업 중이라고 분명히 되어 있었다. 그래도 설 연휴와 이어졌으니, 전화로 거듭 확인하려 하다 그만두고 그냥 왔다.

그런데 휴일, 헛걸음이다. 여기까지 온다고 시간을 들였는데, 허무함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근처에 있는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으로 허기와 허무를 달랬다.

요즘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말할 때 인공 지능에서 찾아본 것을 근거로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믿는다. 그런데 그 근거와 내용이 다 맞을까?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확인도 평가도 하지 않고 그냥 따라만 간다면, 머지않은 날 우리는 인공 지능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확인과 평가를 통해 받아들일 것을, 나에게 맞게 고쳐 받아들이는 능력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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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철 발생한 전체 한랭질환자의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57.4%, 209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대부분의 추정 사망자 또한 65세 이상(78.6%, 11명)이었다. 특히 80세 이상의 고령층에서 32.4%(118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57.1%(8명)가 추정 사망을 보여 고령층일수록 한랭질환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랭질환은 추위가 직접 원인이 되어 인체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질환으로, 저체온증(전신성), 동상·동창(국소성)이 대표적이다.

10일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2025-2026절기 한랭질환 응급실 감시체계' 운영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일부터 올해 2월 28일까지 신고된 한랭질환자는 모두 364명(사망 14명)이다. 전년도 한랭질환자 334명(사망 8명) 대비 1.09배의 환자가(사망자는 1.75배) 발생했다.

한랭질환의 주된 증상은 79.7%가 저체온증(290명)이었다. 더구나 전체 추정 사망자 14명 중 5명(35.7%)이 치매 등 인지장애를 동반하고 있었다. 치매와 같은 인지장애가 있는 경우 한랭질환 건강수칙을 지킬 수 있도록 주변의 관심이 필요하는 의견이다. 추정 사망자(14명)의 경우도 추정 사인 및 추정 원인이 저체온증(100.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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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I 결과 간에 3cm 정도의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지난해 1월 5일, 한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의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미 35년째 혈액투석을 하고 있는 몸이었다. 그래서인지 '암'이라는 말이 놀랍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수술도 못하는데요."

의사는 잠시 영상을 보더니 말했다.

"수술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3cm 정도라 색전술로 치료가 가능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의사는 잘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진료실을 나서는 발걸음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어머니는 며칠 뒤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평생 일만 하시다 70 넘어 처음 가는 해외 여행이었다.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여행을 다녀오신 뒤에 말하기로 했다.

중2 때부터 시작된 투석, 그리고 이어진 시술

나는 만성신부전으로 혈액 투석을 하고 있다. 1990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투석을 시작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투석 병원이 많지 않았다. 섬이 고향이라 혈액 투석을 받을 병원을 찾기 어려웠고, 결국 복막 투석으로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당시에는 투석 환자의 평균 수명이 10년 정도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을 듣고 큰 좌절을 느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또 한 번의 위기가 있었다. 복막염으로 장 유착이 심해져 큰 수술을 받았다. 그때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줄어들었다.
이후 치료 방법을 다시 혈액 투석으로 바꿨다. 혈액투석은 일주일에 세 번, 한 번에 네 시간씩 병원에 있어야 한다. 음식도 조심해야 한다. 생활 시간표가 투석 일정에 맞춰 돌아간다. 그래서 직장을 갖는 것도 쉽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그렇게 35년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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