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침에는 오지 않던 비가 수업을 마칠 무렵 억수같이 쏟아졌다. 종례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내가 일어섰다. 난 4학년 1반 반장이었다. '차렷, 경례' 구호를 하려는데 교실 뒷문이 열렸다.

"호야! 우산 가져왔다."

아버지였다. 우산을 가지고 교실 뒷문을 열어젖히며 큰소리를 내 이름을 불렀다. 쪽팔렸다. 쪽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얼굴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붉게 닳아 올랐다.

"아이고, 선생님! 먼 비가 이래 옵니꺼? 내려오느라 식겁했네요."
"예, 명호 아버님, 잘 오셨습니다. 곧 마치니까 명호 데리고 조심히 가십시오."


아버지는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에 오래된 남방셔츠를 입고 맨발에 황토색 흙이 잔뜩 묻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면도도 하지 않은 시커먼 얼굴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아버지가 나타난 그 순간은 막 쪽팔리고 쥐구멍이 아니라 땅을 파고서라도 숨고 싶었었다. 학기 초라서 반장으로서의 권위를 마음껏 누리려던 4학년 1반 반장 조명호였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 때문에 반장으로서 권위가 실추된 것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쪼그라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그날, 아버지는 우산을 쓰고 저벅저벅 먼저 걸어갔다. 나는 아버지의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후방 10미터 간격 뒤에서 터벅터벅 고개를 숙이며 따라갔다.

집에서는 믿음직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아버지가 집 밖에서는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마주치면 숨고 모른 척했다. 어느 순간 아버지도 집 밖에서는 나를 마주쳐도 모르는 척해 주셨다. 그게 난 고마웠다.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던 내가 아빠가 되었다

그랬던 내가 아빠가 되었다. 큰애는 내가 아버지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던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어제 오랜만에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다. 탕수육이 나와서 한 점 찍어서 먹으려고 하는데 큰 애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혹시 아빠도 그 공연 보러 갈 거야?"

그 공연이란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가려고 예매한 어린이날 특별공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난 그 공연 예매를 위해 티켓 오픈을 하자마자 광클릭을 해서 어렵게 맨 앞자리를 획득했다. 탕수육을 한 점 질끈 씹으며 질문을 하는 큰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의 문장구조 속에는 아빠가 함께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 묻어 있었다. 갑자기 꼭지가 돌았다.

"아빠가 부끄러워? 그래, 아빠가 부끄럽겠지. 니네들이 아빠가 부끄러우면 내가 안 갈게. 엄마랑 셋이서 갔다 와. 그래, 앞으로는 이 부끄러운 아빠는 여행도 함께 가지 않고 조용히 숨어서 지낼게. 부끄럽게 해서 미안해."

내 젓가락에 붙잡혀 한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탕수육 한 점을 내려놓고 난 식당을 나왔다. 아내가 급하게 따라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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